가슴의 무/쓸모


   언제부터 스스로 브라를 찾아 입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노브라로 등교하는 나에게 아침마다 엄마는 아동용 스포츠 브라를 현관까지 들고나와 흔들었다. 학교 가는 것은 좋았지만 등교 시간은 지긋지긋했다. 겨울에는 그나마 방한용으로 괜찮았지만 쉬는 시간 틈틈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여름에 몸에 무언가를 더 하나 걸치는 것이 아주 싫었다. 어쩌다 입고 나오는 날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티셔츠 안으로 꼬깃꼬깃 접어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후딱 벗어 가방에 넣었다. 나는 복도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정신없는 초딩이었기 때문에 스포츠 브라를 입으면 왠지 머리가 잘린 삼손이 된 듯 힘이 빠졌다.


    하루는 점심시간 축구 경기 중에 공을 두고 몸싸움을 하다가 넘어졌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스포츠정신으로 성질을 죽이고 일어나 상대방의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상대방도 내 등을 쳤는데, 조용히 뒤돌아가다 말고 한 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너는 왜 아무것도 안 입었어?” 브라가 걸려야 하는 손끝에 밋밋한 티셔츠만 스쳤던 것이 의아했는지 한마디 쏘아붙이고 가던 애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기분이 나빠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열심히 뛰는 것뿐이었다. 신체 변화가 시작된 열세 살에게 스포츠 브라는 스스로 여자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표식이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던 나는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불편해서였다. 아마존 여전사들이 활을 쏠 때 걸리적거리는 한쪽 가슴을 잘라낸 것처럼 내가 잘라내고 싶은 것은 가슴이 아니라 마치 탈부착 가능한 내 신체의 일부로 강요받던 스포츠 브라였다. 


    여자아이들을 신체활동에서 점점 배제하는 기운들은 나를 제한된 시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뿐만 아니라 주말 특별활동을 선택할 때도 영화보기나 케이크 데코레이션 같은 경제적인 활동은 여성화되고, 각종 계절 스포츠나 단원 활동을 선택하면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주말 특별활동을 했어야 했다. 우주정보소년단이었던 나는 브라를 입고 가는 날에는 입었다고 놀림을 받고, 브라를 입지 않고 간 날에는 안 입었다고 놀림 받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가슴은 시선이 고정된 자리가 되었고 최초로 감시받는 신체의 기관으로 대상화된 가슴은 가려줘야 하고 소중히 챙겨줘야 하는 귀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생리 때문에 자궁을 떼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브라 때문에 가슴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잘라 내야 하는 것은 가슴이 아니라 브라였는데, 화합할 수 없는 시선이 고정된 장소로서의 가슴은 내 몸이었지만 빼앗긴 내 몸이었고, 빼앗겼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무쓸모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 가슴뿐인가? 정답은 아니요.)


    내가 하고자 하는 활동들을 훼방 놓는 가슴은 무/쓸모를 해명하라는 요구에 답을 할 수 없다. 이 수많은 훼방은 가슴이 놓는 훼방이냐, 가슴을 향한 시선들이 만들어내는 질문의 훼방이냐. 나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매복 사랑니나 안구를 찌르는 속눈썹이나 맹장과 다르게 쓸모를 찾아야만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가슴은 이렇게 귀찮은 것이 쓸모까지 없다는 탄식을 불러온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시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기에, 나는 내 몸과 스스로 화합하기 전에 타자의 시선을 통과하는 외부의 방식으로 화합하기를 강요받은 셈이다. 나는 외부의 시선과 강요가 없었을 때도 나의 가슴과 이렇게 불화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무엇을 입을 것인가 고민하다 스포츠 브라를 입고 니케 여신상의 머리 없음과 불구적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니케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떨어졌으면 좋았을 걸.


댓글(1)

  • 먼지
    2019.09.11 15:3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훼방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해방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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