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딸’의 재현 체계, 오래된 여성서사는 어디로 가는가(1)
- 나의 신체(들): 허주영(출판)
- 2020. 1. 15. 19:26
-1980년대 오정희 소설의 여성 신체를 다시 읽기
1. 낳거나, 낳지 못하거나, 낳지 않거나
1980년대 여성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이 새로운 여성서사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동년배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여성서사와 신체를 사유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한국문학/비평장의 일련의 문법을 거치면서 오정희 소설의 여성 인물의 신체는 아이를 지나치게 많이 낳거나, 낳지 못하거나, 낳지 않는 신체로 구분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삶과 출산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여성성의 계보는 아이를 낳다가 낳지 않는 것으로 세대 간의 차이와 공통된 자궁의 가능성을 공유한다. 가부장제를 통과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려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거나 또는 좀처럼 뚜렷한 역할이 포착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여성인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예컨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을 중국인 거리라는 장소에 옮겨 놓는 역할을 할 뿐 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덟 번째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신체를 통한 ‘나’의 “초조初潮”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토해낸 토사물로서 남게 된다. 즉 여성들의 촘촘한 관계와 소녀인 ‘나’가 겪는 일련의 과정은 기호계의 단계를 통과해 아버지의 법 안으로 들어가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석되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고 남성의미체계로 완전히 진입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는 어떠한 의미도 획득하지 못하고 말더듬이로서 기호계와 상징계의 경계에 머무르게 된다. 특정한 여성성의 자리를 마련하는 관성적인 여성문학읽기 방식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어 깔끔하고 동시에 게으르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들에서 집중했던 여성 인물의 삶이 출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서 남성의 반대항으로서 귀결되는 해석에서 벗어나 여성의 신체에 진행되는 변화를 추적하면서 힘으로서의 차이를 통한 다양한 층위로서의 접근을 요청하는 것이다. 집의 은유에서 벗어난 여성 인물이 산책을 나가 마주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명하는 신체를 통한 긍정적인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 남편 또는 남성과의 관계가 아닌 정상규범에서 벗어난 관계 맺기 등 새로운 보편적 개인이라는 주체성을 구성하는 조건의 중심에 있는 서사 위에 마주한 사건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2. 신체의 시간과 차이(들)
신체는 시간성과 연결되어 있다. ‘과거-현재-미래’로 나열되는 근대적 시간성에서 신체는 순서와 속도를 온전히 따르지 않고, 신체에 체현된 기억도 마찬가지로 리뉴얼적이지 않다. 경험이 체현된 신체의 기억에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공명하며, 새로운 시간 의식 안에서 사건들을 경험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또 이미 기억하고 있는 공공의 기억과 역사에 기여하고 개입하면서 신체는 시간 기억 안에서 부딪침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에 놓여 있다.
오정희 소설의 인물들은 남성 의미경제체계에서 벗어나 여성이라는 성별을 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성차화된 신체(sexed body)로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성이나 생물학적 여성을 다시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을 통해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을 새롭게 의미화한다.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읽기 문법에서 오정희 소설의 여성인물들은 출산하거나, 출산하지 않았거나, 출산하지 못하거나, 또는 임신 중지를 한 어머니의 신체로 분화되어 세대 간의 여성들의 차이를 살피거나, 출산을 중심으로 출산의 욕망과 비-출산의 욕망을 통해 가끔 전복 가능성을 얻지만 줄곧 부정으로 귀결되었다.
기표와 기의를 대응시키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여성의 신체는 모체로 대응되고, 그러므로 신체없는 기관으로서, 예컨대 가슴과 자궁과 같은 아이를 품는 기관, 그리고 그 기관들의 기능은 어머니라는 의미 안에서 이해된다. 오이디푸스화를 통해 가족 의미경제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제한된 여성신체의 역량 안에서 오정희 소설의 여성신체를 들여다본다면, 고정되어 있는 기표에 대치나 전이로서 욕망이 순환되고, 그 욕망은 금기로서의 법에 의해 비틀어지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 가부장제 의미 경제 방식의 밖을 상상할 수 없다. 성차를 다루는 오정희 소설의 인물들은 재생산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화 구조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목련초」는 ‘딸-어머니’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의미체계에 대한 서사다. ‘나’를 낳고 심한 산욕을 앓은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그 몸에 신이 실려 무당의 삶을 살아간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를 얻어주고 나가 무당의 직업으로 자리 잡은 어머니는 평소에는 일어날 수도 없었지만 굿판이 벌어지면 작두를 탔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 난 집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겅중겅중 뛰”는 한 그루의 불꽃나무로 타버린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과 죽은 신체가 백골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공포, 안타까움, 배신감 등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이러한 ‘딸-어머니’의 관계는 제도화된 모성(애)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다. 딸은 어머니와의 차이를 통해 동일률을 확인하고 나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는 집단적으로 공유되고 구성된 시공간의 부딪힘이다. 「중국인 거리」의 ‘나’가 끊임없이 아이를 낳는 어머니를 보며 절대 아이를 낳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딸-어머니’ 관계에서 모성은 희생이나 안락이 아니라 혐오나 모욕의 감정 또는 폭력적이거나 잔혹한 행위에 가깝게 나타난다. 모성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소녀인 적이 없었던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떠올리면, 그 논의 안에서의 모성은 가부장제의 발명품이자 제도화 된 어머니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목련을 구할 수 없어요.
나는 참으로 궁색한 대답을 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옹색한 변명이다. 목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의 형체를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풀에 뒤덮인, 풀마저 썩어 한갓 먼지로 풀풀 날릴 때까지도 백골이 된 어머니의 죄 많은 뼈에서 밤마다 피어나는 흰 목련들. 그러나 밤마다 끊임없이 토해내는 꽃송이들이 훨훨 날아 천공을 뒤덮어도 어머니는 백골이 되지 못했다.
한수 씨는 언젠가 내게 목련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을 넘겨보며 만다라를 그리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비의를 엿뵌 듯 사뭇 가슴이 싸늘해져 푸른 밑칠을 한 위에 숱하게 흰 점들이 뿌려진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대꾸도 없이 화실을 나와버렸던 것이다.
‘나’는 캔버스 위에 목련을 그리지만, 그것은 목련이 아닌 만다라의 이미지로 읽히거나 결코 옮겨 그릴 수 없는 것이 된다. 목련을 그리는 행위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자, 어머니의 죽은 신체가 품고 있는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기억이다. 풀에 덮여 뒷산에 방치된 어머니의 그을린 사채는 “백골이 되지 못”하고, ‘나’는 어머니의 버려진 신체에서 목련이 피어나는(터지는) 것을 자신의 신체로 옮겨온다. 그러한 감각은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어둠의 시간에 “꿈자리”에서, “손을 닦다가” 문득 찾아오지만 감각으로 찾아오는 목련을 그릴 수 없다. 한수에게 목련은 인식불가능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목련이 만다라가 되고 만다라가 목련이 되어도 기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만, ‘나’에게 목련은 그릴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구체적인 실재이자, 죽음 후에도 관계 속에서 변이하는 과정 안에 있기 때문에 재현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가 느끼는 어머니 뼈에서 피어오르는 목련의 감각은 여성의 본능이나 원초적인 감각으로 설명 가능하거나, 법과 윤리 이전의 세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딸-어머니’라는 관계 맺기의 과정 속의 기억과 신체의 반응을 통해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신체는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힘들로 구성된 고도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며, 남성의미경제 체계에 밖의 ‘어머니-딸’의 관계에서 ‘나’가 신체의 감각으로 떠올리는 어머니의 기억을 결핍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출산 후 불구가 된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새로운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한다. 아버지를 찾아볼 수 없는 서사의 맥락에서도 집에서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그림을 그리는 ‘나’의 행위는 줄곧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남편을 기다리는 나’로 배치된다. 오히려 이러한 기다림의 행위는 남편을 향한 것 보다 어머니를 흉내내기, 기억하기, 떠올리기에 가깝다. 어머니의 신체는 불구의 비천한 몸이지만 어머니라는 기표 안에서 재생산의 문제를 가부장제 체제로 환원될 수 있는 어떠한 여지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체와 그에 대한 딸의 기억은 가부장제 희생의 신체나 곧 사라질 옅은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의 세계는 존재하지만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서 인물들에게 사건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 관계를 이끌어가는 중심 서사의 바깥에 있다. (계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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