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너의 죽음은 나의 책임이다.

(9화 : 결혼이 뭐길래 후편은 다음 주에 연재됩니다.)


    연예인 설리가 영면한 후 며칠이 지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최초의 보도가 이루어진 날, 여러 반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끓어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왜? 너무 많이 힘들었구나,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를 애도합니다, 당당해 보였는데 아팠구나, 그가 어찌어찌해서 죽었대요, 그가 자살을 했대요, 가장 험한 곳에서 가장 격렬히 싸워준 사람, 저 SNS 잠깐 접을게요, 그런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가 다른 글들이 올라오며 빠른 속도로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군중심리가 작동해서 뭐라고 꼭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이상하고 희박한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에 당면하게 된 죽음은 그런 의무감보다는 조금 더 참담했으므로, 개인적인 애도나 슬픔 대신 부탁의 말을 써서 올렸다. 우리, 시신의 형태가 아니라 죽음에 형태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그가 죽어서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었는가 따위가 그의 죽음을 가십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쉽게 페미니즘의 아이콘이나, 투쟁가로 바꾸는 글들도 읽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몇 년 전 그가 로리타 콘셉트로 작업을 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 중 한 명임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래, 나는 불편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업이 어떤 사람들에게 소아 성애를 학습시킬 것이 우려된다는 의견들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불편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생크림을 가득 짜 넣었고, 어떨 때는 브라를 하지 않은 사진을 SNS에 올려 여론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내가 아는 범주에 한해서는, 전방위적으로 여러 집단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욕받이가 된 여성이다.


    그는 욕을 먹으면서도 당당하고 괜찮아 보였다. 너희들이 얼마나 욕을 하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괜찮았는지, 아니면 괜찮아 보이기만 했을 뿐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옷차림을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개인적인 삶>을 스스로 살아내는데 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삶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에 염증을 내면서도, 왜 우리는 그를 아이콘화하고, 멸시하고, 동경했을까. 더 이상 ‘연예인을 동경하는 대중의 속성’이라는 비겁한 변명 뒤에 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SNS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읽었다. “예쁜 아이 설리가 죽어서 슬프다.” 그래, 그는 그냥 자기 삶 잘 살아내고 싶었던 94년생 여자애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 애를 보지 않았고, 그의 행보만 봤다.


    나는 여성의 삶을 의제로 다룰 때, 항상 개인의 삶보다 숭고한 이념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 해왔다. 어떻게든 행복하고, 타협해서 어떻게든 살아있으라고 사람들에게 권했던 주제에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니까 그에게 직접 말을 건넬 기회가 있었어도 그의 행보를 전면 긍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만은, 그의 삶이 아니라 이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가 죽은 후로 나의 신념이 이만큼이나 비겁했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어떤 부분을 긍정할 수 없기에, 나는 그의 죽음 앞에 놓인 나의 신념이 부끄럽다. 나의 발언이 가진 얇음이 부끄럽다. 그러니까, 이 글은 부끄러움을 놓지 않고 계속 상기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그의 어떤 부분을 긍정하지 못하더라도 여지를 남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여성 인권이라는 거대한 의제에 참여하는 일원으로써 그에게 완고했다.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많은 사람들 앞에 혼자 서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나나 다른 완고했던 사람들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유행처럼 “내가 설리다.”라는 선언이 해시태그화되어 웹상에 떠돌아다닌다. 그것을 보고 있기가 괴롭다. 실컷 욕해놓고, 그와 함께 고민을 나누지 않고, 그와 함께 앓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라고 선언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가 노브라여서? 그가 여성이어서? 몇 가지 분모가 일치한다고 해서 내가 그라니, 그 선언에서 어떤 성찰의 흔적을 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선언마저 내 부끄러움의 이유 중 하나다.


    아니, “내가 설리다.”라는 선언은 부끄러움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여성이 죽어도 고민하지 않는구나, 마음에 들지 않고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자살하게 놔둔 다음 애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동의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더라도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와 조금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벼랑으로 밀어 존재를 지우거나 고개를 돌려버리고 우리끼리 잘 지내는 식의 투쟁은, 이제 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나는 유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뻔히 있는 책임을 없다고 하지 않겠다. 그의 죽음에는 나의 책임도, 또 다른 누군가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선언하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지만, 그 이전에 나에게 먼저 묻기 위해 질문들을 나열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설리였나요? 당신의 어떤 부분을 설리라고 느끼나요? 설리도 본인을 당신이라고 느끼나요? 각자가 서로를 ‘나’라고 선언할 때는, 합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혹시 당신은 설리라는 좋은 도구를 하나 선정해놓고, 본인 구미에 맞는 부분만 분절해서 본인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분절해서 자기가 좋은 부분만 취하는 것을 대상화, 혹은 물화라고 하지 않나요? 당신은 언제부터, 어느 부분이 설리였나요? 당신은 언제부터 스스로 ‘설리 되기’에 동의했나요?


    불편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쭉 나열하면서 내가 그를 대상화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설리의 죽음을,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아름답게 남길 수 없다. 그 누구의 죽음도, 그런 식으로 편집되고 신격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 누구의 죽음도 도구화될 수 없다. 죽음의 도구화를 좌시하는 동안 우리는 성찰을 잊고, 또 다른 누군가가 죽고 나면 그의 죽음도 도구화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릴레이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제단 위의 죽음, 나는 그것이 두렵다.


    ‘노브라 설리’가 아닌 ‘로리타 설리’도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로리타 설리에게 ‘어떻게 대응했는가’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설리를 기억하고, 그가 ‘가장 험한 곳에서 가장 격렬히 싸웠다.’고 단언하고 싶어지면 우리 또한 그를 험한 자리에 두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것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동의할 수 없는 정치적 행보를 보았을 때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판과 폭력을 구분하는 브레이크는 스스로 하나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함께 이야기 나눌 여지는 남겨두어야 이후로 아무도 죽이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죽음을 줄일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 이제 아무도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이야기가 웹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죽음을 더 이야기하지 말자고 암묵적 합의라도 한 듯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주는 데미지-누군가의 죽음은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에서 도망쳐, 나와 내 주변 사람이라도 보전하자고 정한 것 같다. 나도 앞서 언급한 글-시신의 형태가 아닌 죽음의 형태에 대해 이야기하자-을 한차례 올린 후로는 그에 대한 글 대신 내 일상의 이야기와 사진을 웹에 올리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의 죽음을 뒤로하고 필사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우리 내면의 어떤 부분적 형태를 바꾸는 데에 기여했음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한 여성의 죽음을 잊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므로, 그가 죽은 이후에 무엇을 바꾸고 누굴 살릴지는 우리의 책임이 된다. 더는 한 명의 여성을 잃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더 부드럽고 강하게 설득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한 명의 여자아이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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