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감각 (2)
- 온전히 생존기: 김경진
- 2019. 11. 11. 16:33
또다시 다섯 개의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그저 보냈습니다.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일상에서 기록된 몇 가지의 문장을 쥔 채 다시 고민을 시작합니다. 고민이 되기 전의 문장들을 펼쳐놓습니다. 여기에 문장이 있습니다. 모쪼록, 나날을 보내는 만치 가볍게 읽어주세요. 읽고 잊어버려 주세요.
30만 원.
30만 원은 조금 묘한 액수다. 아주 값어치 있는 돈도, 아주 값어치 없는 돈도 아니다. 지금은 연이 끊긴 지인이 싸게 주겠다고 흥정했던 작은 스쿠터도 30만 원이었고, 누군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도 자주 30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었고, 서울에 자리를 잡을 때 보고 다녔던 집세 싼 곳의 원룸들도 보통 보증금 500에 월세 30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스쿠터보다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스쿠터는 다시 팔려나갔고, 빌려줬던 돈들이 제때 손에 돌아오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월세 30짜리 방들에 들어가서 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찌라시처럼 돌아다니는 글 중에서 사람이 숫자 3에 안정감을 느낀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30만 원은 무의식중에 우리가 추구하는 안정의 최저금액인 걸까, 우리는 자꾸 불안한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쓸모도 근거도 없는 생각일 뿐이다.
택시.
몸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날, 택시를 타고 일을 하러 나선 적이 있다. 내가 자꾸 잠긴 목소리를 내고 코를 훌쩍이고 식은땀을 흘리니까 기사님이 아가씨, 어디 아파요?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냥 감기에요. 하자 청포도 사탕 하나를 꺼내주시며 목이 아플 때는 단 것을 먹으면 좋아요. 하셨고, 그 청포도 사탕 하나를 계기로 목적지까지 가며 많은 얘기가 오갔다. 기사님의 막내딸이 나와 동갑이고, 얼마 전에 결혼했고, 살갑고 애교가 많다는 것, 기사님 또한 어릴 때 분가하여 사람 정이 그리웠고, 그래서 자식들을 더 살갑게 키우려 애썼다는 것, 기사님은 모 신문사에서 22년 9개월을 일한 후 명예퇴직하여 택시 기사를 하고 있고, 직업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 대우에 너무나 참담했다는 것. 사람들이 왜 그럴까. 택시를 타건 똥지게를 타건 그게 무슨 상관일까. 아가씨, 다 똑같이 사람인데. 똑같이 사람인데, 하고 소망이 섧게 울리는 것을 듣고 나는 웃을 수 없어서 웃었다.
집1.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본인의 집을 지을 재료를 속에 지니고 태어난다. 누군가의 집은 무대, 누군가의 집은 연습실, 누군가의 집은 극장, 누군가의 집은 유리로 지어져 바깥쪽에서도 안을 볼 수 있는 화랑, 누군가의 집은 도서관, 나의 집은 응접실이 있는 도서관이다. 넓은 도서관, 중앙에 숨겨진 큰 방에 신전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집이 넓어진 무렵부터 집을 유지 보수하는 데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한쪽을 막으면 또 한쪽에서 곰팡이가 피고, 곰팡이를 지우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가 지하 공간이 이미 침수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식이었다. 집은 누군가를 초대하고 맞이하기 위해 지어진 것인데 이런 집에 선뜻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다. 도서관의 가장 작은 단위인 한 권의 책이, 내부에 신전을 품은 거대한 도서관으로 자라기까지의 이야기.
집2.
천천히 움직이는 이유는 쏟아질 것이 많아서고 집의 문이 잘 열리지 않는 이유는 집 내부가 사람을 들여선 안되는 미로여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넓은 미로에 사람을 방치하는 일은 미로도 슬퍼지고 사람도 슬퍼지는 나쁜 일이다. 손잡고 앉아 서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그 찰나에 우리는 잠시 같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네가 종종 응시하는 침엽수림과 산능성이에 둘러싸인 청록빛 얼음 같은 와카티푸 호수의 풍경을 모르고, 상상을 해 볼 뿐이고. 나는 네가 매일 속하는 작은 회사 안의 네 자리에 놓인 아이맥 프로를 언젠가 보았지만, 거기 있는 아이맥 프로가 지금도 그 아이맥 프로인지 확인해 볼 길이 없고.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나는 네가 일상적인 긴장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밤마다 웅크려서 속절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알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때 네 어깨를 덮고 있을 이불의 색깔과 재질감은 모르고. 모른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알려고 물어본 적은 없고. 그리고 너는 내가 일을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맡아지는 냄새의 역겨운 질감들과, 그 역겨움 만큼의 헛헛함을 모르고. 그걸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같지 못하다. 각자의 경계로 떨어져 나간다.
비밀.
사실 자기를 숨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것저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만이 나의 전부인 양 스스로도 착각할 만큼 솔직하게 말하다 보면, 사람들은 보고도 모른척하거나 보이는 만큼이 전부라고 믿어버리기 마련이다. 나는 슬픔을 말하는데 너무 익숙하고 유려하다. 나는 다른 것들을 숨기고 싶어서 꽤 자주 슬픔만을 말한다.
빈 공간.
내 엄지손가락은 뒤로 90도 넘게 젖혀지는데 이건 아빠에게서 유전된 것이다. 엄지손가락을 골똘히 노려보다가 문득 이 구멍도 아빠에게서 유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빠는 내가 중학생일 때 내 앞에서 수면제를 한, 반 움큼 먹은 적이 있다. 살기가 싫다. 속이 답답하고 허해서 살 수가 없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수면제는 과 복용해도 죽지 않으니까 나는 그냥 아빠를 내버려 두었다. 그때, 아빠의 구멍은 더 벌어졌을 것이다. 구멍이 없어 보일 만큼 크게 벌어져 허공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가 전자레인지와 의자로 나를 쪼아 구멍의 시작을 유전했듯, 나도 아빠에게 허공을 주었다. 아빠는 그날 하루 반나절 일을 쉬고, 다음 날부터 다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빠를 그냥 내버려 두었던 이유를 아빠는 묻지 않았고, 나도 아빠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마음을 설명할 말 같은 것은 아직껏 찾지 못했고, 그래서 가끔 아프고,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가끔 읽히지 않길 바라며 글을 쓴다. 그러고도 아빠는 잘생긴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역사처럼 늙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물처럼 습한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사실 물이 아니라 나무 같은 사람이다. 물은 여러모로 좋다. 물은 존재만으로 많은 것을 기르고, 한곳에 모이면 덩어리졌다가도 고통 없이 분리되고, 물길이 혹여 잘못되어도 손으로 토닥여 길을 바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무가 자란 시간은 손으로도 톱으로도 바꿀 수 없다. 잘라내고 태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무가 자란 시간은 옹이로, 굽이로, 테로 남는다. 나무의 시간은 번복할 수 없다. 사주를 본 일이 있다. 나는 나무인데, 뿌리도 없고 비빌 언덕도 시원찮아서 원형대로 크지를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기괴하게 굽이치는 나무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마음에 박혔다. 뿌리가 없어 하늘로 자라지 못하고, 제 속으로 속으로 굽어들다가 이상한 모양으로 굽이쳐 자라 난 나무. 나무는 말라죽기 직전까지 멈춘 듯 자란다.
발찌.
작년 봄쯤의 일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시외버스를 타러 고속터미널역에 내렸을 때,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이 무언가에 의해 휙 당겨지며 그대로 넘어진 일이 있었다. 어찌어찌 털고 일어나긴 했지만, 손 한 뼘 짚고 일어날 공간 없이 사람들의 발로 까맣게 찬 땅바닥을 보니 어쩐지 정신이 까무룩 하고 코끝이 찡했다. 그 악다구니 쓰는 발들 사이에서, 그걸 보고야 말았다. 작은 발과 얇은 발목이다. 그 작은 발과 얇은 발목은 3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여성의 것이다. 건조한 표정의 얼굴도, 남색 마이 차림도, 흰 셔츠도, 검은 슬렉스 차림도, 아무 무늬 없는 단화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말 것이라는 결의가 엿보인다, 그런데 그의 발목에는 발찌가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고리가 없이 빨강, 파랑, 노랑의 끈들을 새끼줄 꼬듯 꼬아 발목에 느슨하게 묶은 모양새다. 차림새와는 달리 선명한 원색의 발찌는 어쩐지 이질적인 낭만을 느끼게 했다. 꽤 오래 차고 다닌 듯 끈의 끝이 약간 때가 타서 나달거리는 것도 꼭 그런 느낌이었다. 그가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본인의 개성인지, 혹은 어떤 염원이 담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발찌를 보며 긍정적 미신을 담은 소원 팔찌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이 회색 얼룩 같은 옷을 벗고 떠날 거라고, 발찌가 말하는 것 같았다.
일상 2.
개들의 섬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누가 나를 버렸나요? 누가 나를 못된 사람으로 만들었나요? 나인가요? 아니면 당신? 그런 물을 사람 없는 물음들이 자꾸만 가슴께에 차올라서 나는 자꾸만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것을 하였습니다. 떠돌이 개님도 그것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왜 무는지 나도 이유를 몰라, 라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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