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결혼이 뭐길래 (2)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하여튼 나에게 처음 결혼 얘기를 꺼낸 남자는 내가 20대 초 중반이던 시절 연애하던 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결혼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나는 서른 살쯤 넘으면 천천히 결혼 같은 것도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이었고 내 입장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는 틈만 나면 우리 둘 다 안정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그린 인생의 그림에는 ‘결혼한 나’라는 것이 없었다. 남의 울타리 안으로 편입되면서 내가 타자화되는 것이 불쾌하고 무서웠다.

    이 불쾌함과 무서움의 근본이 되는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최초의 사건은 일곱 살 때다. 내가 일곱 살이고 동생이 다섯 살이던 어느 겨울날, 엄마는 나갈 채비를 했다. 엄마, 우리 갑자기 어디 가? 하고 묻자 엄마는 외할머니 댁에 간다고 했다. 그 겨울이 유독 춥게 기억되어 있다. 겨울날 나와 동생의 손을 잡고 지하철역 플랫폼까지 갔던 엄마는 벤치 의자에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있다가 그냥 집에 가자, 하고는 다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집에 돌아갔다. 엄마는 집에 도착해 동생의 패딩을 벗기고 머플러를 풀고 겉옷을 벗기고 내복을 벗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나갔던 거 아빠한테 얘기하면 안 돼. 일곱 살의 나는 엄마의 분위기가 스산해서 왜? 하고 되묻지도 못했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모두가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지만 22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결혼한 삶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나의 욕망과 감각을 스스로 거세해야 하는 삶,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삶,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커졌지만 그 생각에는 무언가 명확함이 없었다. 결혼을 당사자로서 고민해 본 경험이 그때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막연한 언어로 결혼에 대한 언급 자체를 거절했다. 당시 내 주변에는 고민을 함께 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닥쳐 온 결혼이라는 삶의 의제 앞에서 나는 스스로 삶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기에 휩쓸리고 시대에 편승하고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좀 쉽게 말하자면, 이런 말들을 지속적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인데 좀 일찍 하면 어때. 옛날로 치면 사실 지금도 그렇게 일찍은 아니야. 남자 그늘에서 사랑받고 사는 것도 여자의 행복 중 하나야. 이제 조만간 경진 씨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 네 남자친구 나이가 지금 몇이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고 네 남자친구 인생 인질 잡는 거니. 애가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니. 나는 결혼에 아직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주변인에게 이기적인 여자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글에 쓰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일이 그와의 관계 안에서 일어났지만,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바깥으로 알려지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소한 일로 치부되었다. 나는 그에게 트로피였다. 여덟 살 어린 똑똑하고 예쁘장한 애인. 이 친구가 어리지만 참 생각이 깊어요. 라고 말할 때의 뿌듯함, 나를 소개받는 그의 지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의 어떤 충족감, 나는 그에게 내가 아니라 그런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기적인 여자로 불리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가 나와 결혼하려 했던 이유 또한 나와는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여러 사회적인 욕망-그가 어느 정도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명으로써의-의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사정 모르는 주변인들이 나를 채근하기 시작하자 그, 사귀던 남자는 전략을 바꿨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합의하는 대신 주변인들을 설득해서 나를 압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내 주변인들을 포섭하러 다녔다. 내 남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우리 엄마를 찾아가 같이 식사를 했다. 나에게 본인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다 너랑 결혼하려고 이렇게 하는 거야. 내 주변인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이 좋아지고 주변인들이 입을 모아 나와 그의 결혼을 말할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죄책감을 가지고, 그 죄책감을 더 지고 있지 못하게 되었을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 쪽 부모님과의 약속이 잡혔다. 나는 그에게 날짜를 통보받았다. 그는 편한 식사 자리라고, 부모님과 밥 한 끼도 못 먹어 주냐고 화를 냈다. 그럼 이제 와서 다음에 보자고 해? 중요한 것이 밥 한 끼가 아니라 사전에 나의 의사를 묻지 않았던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걔가 그간 가족들한테 얼마나 잘했니. 그만하면 모자라지 않아. 얼굴 보여드리고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야. 집에 오면 다시 전화하고. 꼭 다시 전화해.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 일은, 모두의 체면을 망치는 극악무도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에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는데, 그가 자꾸 말을 보탰다. 입술을 빨간색 말고 분홍색으로 발라라, 머리를 올려봐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볼 터치 같은 거 없냐, 뭐 그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말에 따라 화장을 지우고 다시 하면서, 옷을 입었다 벗으면서 내가 아주 멍청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의 취향은 결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실감 났다.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여기는 연극 무대야. 아니, 여기는 상품을 진열하는 쇼케이스야.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채비를 하고,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가 만난 남자의 부모님은 편한 바람막이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도 평소대로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캡 모자를 쓴 차림이었는데, 나만 이질적으로 정장 치마를 입고 머리를 올리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그들이 좋을 대로, 그들이 결정한 편한 옷을 입고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상품이고, 그들은 구매자였다. 그들은 상품의 정보를 알기 위해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어디 사시니? 몇 살이라고 했지? 혼자 살면서 밥은 잘 챙겨 먹니? 네가 오빠에게 잘해야 해. 돈 같이 번다고 남자 이겨 먹으려고 하면 가정이 불편해진다. 앞으로는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아침에 오빠 집 가서 밥해주고 같이 밥 먹어라. 남자들은 원래 그런 거 못 챙긴다.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들 이런 걸 포기하고 살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강요당하니까 행복하지 못한 거구나. 여기서 말하는 ‘이런 거’는, 개인인 나의 리듬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생활 방식, 내 삶이 흘러가는 속도, 내가 좋아하는 것, 내 의도, 그것이 총체적으로 종합된 나의 리듬, 나의 삶. 그 자리에서 나는 알았다. 내가 결혼이 불편하고 두려웠던 이유는 나를 제외한 내 주변의 모두가, 나의 삶 대신 타인의 삶에 편입하여 생존하라고 강요하는 지점에서 생겼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발로 걸어 그 자리에 왔고, 그것을 자각하자 이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너무 오랜 시간 방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통스럽지만 다행스러운 앎이었다.

    만남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거리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그는 내 눈물을 불편해했고, 여기저기에 화를 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에게 그런 어른들 말 그냥 흘려버리면 되지 융통성이 없다며 화를 냈고, 다음에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편한 식사 자리라고 데리고 나온 건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냈다. 다음에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해서 그래도 그간 자기가 잘 하지 않았냐고 애걸복걸했다. 나에게는 그의 감정 중 아무것도 와닿지 않았다. 그의 분노, 당황스러움, 초조함이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와 결혼 얘기를 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이별을 고하고 뺨따귀를 후려갈겼으면 좀 시원한 결말이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실행력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와 관계되어 있는 시간 동안 복합적인 이유로 이것저것 지치고 포기하면서 홀로서기 하는 삶이 아득히 멀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와는 좀 더 이후에, 다른 계기를 맞아-계기를 맞았다기보다는 이유가 쌓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헤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1인 가구 여성으로서 자기 리듬을 잘 감당하며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나와의 관계를 끝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결혼한 이후에 나에게 치졸한 방식으로 감정적인 복수를 해서 나를 좀 열 받게 했다. SNS에 지금의 부인 되는 분과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내 SNS에 실수인 척 좋아요를 눌러 본인 존재를 노출 시킨다든지, 전입 신고 때 연락처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 넣어 그의 신혼집 주소지를 알리는 한편 행정적으로 귀찮은 일을 만들어 놓는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해가 거듭되자 그의 치졸한 복수도 그쳤고, 가끔 과거의 인맥들을 통해 그의 소식이 들려오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뭐, 그다지 감정적으로 동요가 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때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길 잘했다는 것이고, 포기하고 내려놓았던 삶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천천히 다시 그러쥐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는 삶도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좋았을 수도 있고, 지금 사는 삶이 내 몸에 꼭 맞춘 옷처럼 만족스러운 모양새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 힘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실감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고, 이렇게 과거의 일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멋진 사람으로 자랐다. 그때 결혼을 했다면 아마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포기한 것 중에는 지속적인, 나를 위한 글쓰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남들이 하니까, 남들에 의해 떠밀려서, 남의 필요 때문에 내 삶의 의제를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직도 포기해야 할 것이 먼저 생각나는 것 보니 나에게 결혼은 아직 불편한 고민의 지점에 놓인 의제인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게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필요를 느끼게 된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다. 결혼은 관계와 별개로, 필요에 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한 번 해보았으니 이후의 고민은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때까지는(그때가 언제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 잘 살아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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