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김보라의 <벌새>: 보편은 움직인다

*본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건 꿈인가?


    내가 기억하는 한, 제일 오래된 꿈은 무엇일까. 아마도 너 다섯 살 무렵. 나는 물속에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간 것 같다. 녹음이 짙은 숲을 한켠에 두고,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넓게 퍼져있다. 나는 열심히 아빠를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그러다 중심을 잃고, 물속에 떨어진 듯하다. 열심히 허우적대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 밖에서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영화 <벌새>의 첫 장면은 이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은희네 집에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들.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는 아버지의 고함과 서럽게 들썩이는 울음소리… 배경과 배역이 조금 다를 뿐,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히 깨어났다. 이 영화가 좀 더 빨리 왔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 시절 집에서 겪었던 폭력은 너무 사적이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권력에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기 전에, 그래서 더 많은 폭력을 이해하고 용인하기 전에, 좀더 일찍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누가 너를 다치게 한다면 맞서 싸우라는 영지 선생님의 말에 확신을 얻었을지도.


미안해해야 하는 사람들


    은희와 지숙에겐 오빠가 있다. 지숙이 오빠에게 맞아 마스크를 쓰고 학원에 왔을 때, 은희는 크게 놀라지 않는다. 대신, '오빠 새끼'에게 뭘로 맞았는지 어떻게 맞았는지 맞을 땐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종류의 폭력은 일상이다. 지숙은 묻는다. 다들 우리에게 미안해 하긴 할까. 마치 먼 미래에는 그 답이 있는 것처럼 질문 아닌 질문 앞에 둘은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본다. 은회와 지숙은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 살며 물질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 권력에 대한 복종, 그들이 아내와 딸들과 이웃집 여자들에 대한 욕지기를 내뱉을 때마다 견뎌야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경험은 은희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어릴 적, 아버지가 화를 낼 때마다 나는 그의 비뚤어진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다. 아니라고,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그 한 마디에 나의 말들은 모두 ‘말대꾸’가 되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빌어야 했다. 나의 말들이 아버지 권력으로 두드려 맞을 때마다 나는 말이(혹은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가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는 내게 늘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아느냐고, 어서 죄송하다고 빌라고 했다. 그래서 빌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력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한 뒤에야 나를 용서했다.


    사과는 그에 대한 굴종이었고, 용서는 그가 베푸는 시혜였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족들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피해자임을 자처했다. 현재까지 오기 위해 그들이 겪었던 시간들을 그럴듯한 한 편의 피해 서사로 만들어 현재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한 비난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내 아버지의 레퍼토리를 회사에서, 그리고 뉴스를 통해 본다.


화해의 경험


    은희와 지숙은 어느 날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기로 하지만, 문방구 아저씨에게 금세 들키게 된다. 부모님 전화번호를 대라는 아저씨의 윽박에 못 이긴 지숙은 은희네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대답한다. 배신감을 느낀 은희는 지숙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치지만 오히려 지숙은 너 미쳤냐고 되묻고는 황급히 사라진다. 세상이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고 있던 지숙의 배신은 은희에게 더 아프다. 둘은 은희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화해하게 된다. 그 아저씨가 때릴까봐 그랬다는 지숙의 말을 은희는 단박에 이해한다. 경험된 폭력이 어떻게 그를 움츠러들게 했는지, 은희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너가 날 버린 줄 알았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위계에 의한 폭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용인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과”는 주로 실패나 패배로 여겨진다. 사과와 용서, 화해를 관계의 위계구도 속에서 주로 경험하다 보면, 연인, 친구 사이와 같은 동등한 관계에서조차 제대로 된 화해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은희와 지숙이 화해하는 장면을 보며 문득 화해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사과하지 않았지만, 사과가 실패나 패배가 아니고 용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경험은 매우 소중하다. 나는 은희가, 그리고 지숙이 그날 밤 가로등 밑에서 경험한 “화해”가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데에 작지만 큰 힘이 되리라, 안도했다.


함부로 이야기될 수 없어

 

    영화는 한편 1994년 서울의 사회적 부조리를 ‘배경’으로 비춘다. 그 면면들을 배경으로 은희의 일상이 오간다. 어느 늦은 저녁, 영지 선생님과 은희는 철거촌 앞을 지나간다. 죽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분노에 찬 외침을 담은 철거민들의 현수막은 영화 말미에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있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그들이 왜 그러한 현수막을 걸었는지 설명해준다. 그리고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은희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사실 은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급에 속해있다. 보편적이라는 건 그의 이야기가 충분한 대표성을 띌 수 있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남성중심 사회에서 ‘은희’는 여전히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자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 여성 청소년이지 않을까. 마치 “김지영”이 한국 남자가 받아들이기 가장 쉬운 수준의 여성 서사인 것처럼. 영화는 은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지 않은 삶들에 대해 최소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영지 선생님의 입을 통해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이 영화가 자신이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어떤 삶들에 대해, 이야기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보편적인 은희”는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자리를.


    때문에 이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 그러했듯, 남성중심사회의 보편을 움직여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으로 수렴되지 않는,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삶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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