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제임스 맥테이그의 <브이 포 벤데타>: 자기 안의 신념
-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 2019. 11. 13. 17:39
그는 정말로 잊었는가
며칠 전, 모임이 끝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있던 한 사람이 한국의 민주화가 얼마나 힘겹게 얻어진 것인지 요즘 홍콩 시위를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엔 7,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던 한 남성 대표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는 홍콩 시위에 대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라 답했다. 그리고 홍콩 시위에 미국 자본이 유입되고 있다는 루머를 덧붙이며 결을 같이 하여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가, 민주화에 목소리를 높이다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그가, 어떻게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그들의 목소리를 진영 논리의 프레임에 가두는 말을 쉽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기억을 잊었는가? 그가,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지, 그는 정말로 잊었는가?
신념은 우리 안에 있다
영화는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빅브라더 정부, 전체주의 아래 독재 정치를 표방하는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신원 미상의 혁명가 "브이"라는 인물을 만난 뒤 민주 시민으로 각성해 나가는 "이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처치해야 할 악은 분명하고, 대중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이들을 눈 뜨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건'이다. 브이는 1605년 11월 5일, 왕정을 뒤집으려 했던 한 인물의 혁명 정신을 기억해내기 위해 재판소를 폭파한다. 이때 그가 민중에게 기억하도록 주문하는 것은 혁명을 이끌어낸 그 시대의 신념이다. '사건'을 만들어 낸 브이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기억하기를 주문하는 것은 사실 거대서사 속에서 펼쳐지는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다.
발레리. 브이의 거처에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밀 수용소에 끌려가 인체 실험을 당하며 죽어간 그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다. 쇠창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간 작은 쪽지는 발레리에게서 브이로, 브이에게서 이비로 전해진다. 신원 미상으로 생을 마감한 무명의 배우 발레리의 이름과 삶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 통치의 대상으로서 사회 구성원이 불리워질 때 개인의 삶은 쉽게 소거된다. 때문에 통제 사회 속에서 그들이 과연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사는가를 기억하는 일은 "혁명"이 특출난 어떤 '영웅적 존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신념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있으며, 혁명은 그것을 단초로 일어난다. 의지와 신념을 자각한 이비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비로소 자기 안의 신을 본다.
영화 내내 '브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브이와 같은 마스크를 쓰고 일제히 거리로 나가 그들 모두가 '브이'임을 주장한다. 정부는 무력으로 사람들을 탄압하려 하지만, 시위 대열은 이제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이비는 화약을 가득 실은 열차에 브이의 시신을 싣는다. 브이의 익명성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화려하게 폭파되는 국회의사당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일제히 마스크를 벗어 던진다. 비로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얼굴(삶)"을 되찾는다. 이제 그들에게 "익명"은 필요하지 않고, 또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명"이 아니다.
무엇에 연대할 것인가
2014년 우산혁명 이후, 올여름부터 재점화된 홍콩 시위는 '송환법 철회'라는 과정을 지나 홍콩의 자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21세기 제국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중국 정부의 의지에 따라, 시민들을 향한 홍콩 정부의 물리적 탄압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역사 속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짐작하게 한다. 나는 80년대 말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태어났으며, 90년대 초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문화의 범람 속에서 자랐다. 내겐 "민주사회"를 투쟁을 통해 쟁취한 실제 경험이 없다. 이후에 벌어진 여러 시위에 참여하고 그 시위에서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 때의 실망, 분노, 기쁨, 환호의 감각은 있었으나, 경찰이 나를 때려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공권력에 의해 의문의 사고로 포장되어 사회적 타살의 주인공이 내가 될지 모른다는 밑단의 공포는 없다. 때문에 홍콩 시민들이 느끼고 있는 '자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내게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영역이 아닌, 한 사람의 민주 시민으로서 다른 민주 시민이 얻고자 하고 누리고자 하는 그 최소한의 권리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영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홍콩 시위와 관련된 기사와 소식을 SNS에 공유하고 몇 마디의 말을 얹고 서명을 하는 일들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민주적”인가?
한편, 이건 어떠한가. 현재 한국 사회는 실제로 “민주적”인가? 홍콩 시민들은 한국이 어떻게 민주화를 이루어냈는지 알고자 하고 또 지지받길 원하고 있으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들이 답습해도 좋을 만큼 민주화를 이루었는가? 당신과 함께 싸우던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왜 역사는 ‘브이’와 같이 남성체로 대표되는가? 80년대 말~90년대 초는 민주화를 이룬 역사적 환희에 가득 찬 시기이기도 하지만, 남아선호사상에 의한 여아 낙태가 집중적으로 일어난 젠더사이드(성별에 따른 대학살)의 역사를 남긴 시기이기도 하다. 민주 사회를 함께 이룬 여성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가부장제 사회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혐오하는 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고, 가부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 시기에는 여성을 우선 해고하고 그들에게 다시 정상 가족의 범주 안으로 돌아가 남성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라 주문했다. 학력고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나아가 무한경쟁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기틀이 되었고, 그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소위 “지식인”들은 현재 자신이 속한 특권 계층의 계급성을 부정한 채 여전히 시대의 피해자임을 앞세워 권력의 세습구조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당신은 아마 지금 사회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지난 시간 동안 어찌할 바 없이 축적되어 온 결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홍콩 시위를 진영 논리에 가두는 당신의 발언은 현 정부의 외교적 입장에 대한 변명으로, 지금 그 자리에 있게 한 자신의 신념을 손쉽게 잊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수없이 많은 순간들에 있었다. 당신이 홍콩 시위를 통해 떠올려야 할 것은 당신이 어떤 민주 사회를 만들길 원했는지에 대한 고된 성찰과 잊혀진 신념이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새로운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오로지 자신과 같은 진영 혹은 계급의 부와 권력, 명예만을 위해 입을 열게 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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