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뤽 다르덴, 장 피에르 다르덴의 <내일을 위한 시간>: 모두를 위한 작은 투쟁


    변화를 원한다지만


    최근 몇 년 간 회사 내 직원들의 불만은 날로 쌓여갔고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사실상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창립 이후로 쌓여온 그릇된 조직문화에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으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근로 환경 및 업무 절차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했다. 사측은 근로자총회를 통해 제기되는 근로자들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해왔고, 나은 경우엔 개선 방법을 제시하라고 답했다. 사실 직원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노동인권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부당하고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 것인가 근로자 측에도 뚜렷한 묘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근로자총회에서 노조 결성을 위한 찬반 투표를 진행하자는 안건이 처음으로 나왔다.


    그런데 초반에는 노조 결성에 적극적이었던 직원 중 일부가 조합비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 혹시 상위 조직에서 동원을 요구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합비는 노조 결성 과정에서 합의를 통해 결정하면 될 일이고, 상위조직의 동원 요청에 대한 부분은 명확한 확인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진심 어린 우려라기보다는 노조 결성을 무마시키고자 하는 의도라 여겨졌다. 왜일까? 이후 사실 확인을 위해 담당자에게 문의해보니 회사 단위가 너무 작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그는 노조가 결성되면 노조위원장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그에 따르는 임금이 지급되어야 하는데, 과연 사측이 그에 대해 협조적으로 나올지 우려했다. 나는 설령 동원을 요구받는다 하여도 그것이 그렇게 문제될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오로지 "우리"의 노동환경만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집단 이기주의 아닌가? 마치 이 사회에서 따로 떼어진 존재들처럼 우리만 잘 살고, 우리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산드라는 산드라일 뿐


    주인공 산드라는 동료 줄리엣을 통해 회사에서 보너스냐 자신의 복직이냐를 두고 직원 투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결과는 보너스가 과반수로, 산드라의 복직을 선택한 사람은 2~3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안 산드라는 절망하지만, 동료 줄리엣과 함께 사장을 찾아가 재투표를 약속받고, 주말 동안 16명의 동료들을 직접 설득하기로 마음먹는다. 보너스를 바라는 그 마음과 다를 바 없이 산드라 또한 팍팍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돈)가 필요하다. 그건 그들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산드라는 다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또 누군가에겐 자신이 성취해서 얻은 것을 빼앗으러 온 염치없는 도둑으로, 부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괴롭히고 돌아다니는 무능력자, 회사로부터 언제든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함께 놓인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산드라를 통해 보는 것은 자기 욕망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산드라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산드라는 그저 산드라일 뿐이다.


    산드라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투표 결과는 8:8로, 결국 찬성표가 절반을 넘지 못해 복직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으므로 산드라에게 후회는 없다. 마지막으로 그를 지지해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짐을 정리하는 산드라에게 사장은 새로운 제안을 한다. 곧 계약직 직원과 재계약을 할 예정인데, 그 대신 산드라를 채용하겠다고 한다. 반대표가 절반을 훌쩍 넘길 때와 다르게 회사의 결정에 불만을 품는 분위기가 형성될까 덜컥 두려워진 것이다. 산드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보탬이 될 보너스를 포기하고 산드라를 지지해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누군가의 일자리와 보너스를 저울질하는 투표에서 보너스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산드라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복직을 위한 개인적 투쟁 과정을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저울질하며 의자뺏기 싸움을 강요하는 잘못된 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노동자는 대체 누구인가


    사실 중산층 화이트칼라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나의 동료들은, 부당해고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야간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밤낮없이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와 같이 몹시 열악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측은 이 점을 이용해 도대체 왜 배부르고 등 따신 너희가 노동권을 주장하는지 되묻는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조차, 정규직과 계약직은 엄연히 다른 조건 속에 있음에도 우리 안의 차별은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으며,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을 고발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근거 조항이 모호하고 불충분하여 개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상당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나는 묻고 싶다. 뉴스 기사에서나 볼 법한 차별과 억압이 아니면, 그것은 차별이 아닌가? 이미 노동자성이 인정된 사람들은 노동권에 대해 알거나 이를 주장할 수 없는가? 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인 노동자들보다 사정이 낫다는 이유로 사측은 자신들의 방만한 대응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안의 노동자성을 지우고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다른 노동자를 '진짜 노동자'로 분리하는 것은, 성희롱 성추행 피해자와 성폭행 피해자에서 '진짜 피해자'를 나누고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이미지만을 인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노조 결성 실패 이후 직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결국에는 팀 하나가 전원 퇴사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대체 무엇이 불만이냐고 앵무새처럼 되묻는다. 키우는 개가 고마움도 모르고 짖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간 따뜻한 아버지 연기에 심취해있던 신임 단체장은 가면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고심 끝에 구체적인 해결방안까지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측에서 고안한 방안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갈 길이 점차 멀게 느껴지는 가운데, 산드라의 뒷모습을 보며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의 작은 투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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