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반말의 기술
- 예민한 알바생: 조이(연재 종료)
- 2019. 10. 31. 18:14
뭐든지 처음은 낯설고 그 낯섦은 결국 어려움이 되어버린다. 해내야 하는 업무의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낯설기에 어렵게 느껴진다. 이 아르바이트 일도 그러하다. 오랜만에 마주한 포스는 예전에 사용하던 포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카드 결제를 누르면 바로 결제되지 않고 승인 키를 한 번 더 눌러야 결제가 된다는 것이나, 바코드가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상품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마다 가격을 확인하여 그 값을 결제하고 후에 시간이 있을 때 몇 번의 클릭을 걸쳐 바코드와 가격을 등록해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포스 조작의 낯섦뿐만 아니라, 편의점 업무와 동시에 샷을 내려 커피나 기타 음료를 제조해야 하는 카페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도 큰 낯섦이었다.
늘 그렇듯 시간은 꽤나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많은 낯섦은 익숙함이 되었고 이곳의 일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중에 가장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것은 담배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담배는 국내 회사, 영국 회사, 미국 회사, 일본 회사로 각각 구분되어 진열되어 있는데 다른 회사인데도 서로 비슷한 이름이 꽤 있었다. 2013년부터 담배 이름에 ‘라이트, 마일드, 순’ 등의 순하거나 몸에 덜 해롭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문구가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구매자들은 여전히 “순 주세요.”, “던힐 라이트요.” 등으로 변경되기 이전의 명칭들을 사용하곤 했다. 알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제가 담배를 안 펴서 담배 이름을 잘 몰라요.” 혹은 “알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등으로 주저하면, 손님들이 “밑에서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요.”하는 식으로 그 담배의 위치를 짚어주곤 했다. 이렇게 낯설었던 담배 이름도 몇 주가 지나자 익숙해져 이제 손님의 입에서 담배 이름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이 그 담배를 향해 있는데,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님의 ‘반말’이었다.
주차가 용이하기 때문일까, 이 매장의 주된 고객은 크고 작은 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버릇은 다짜고짜 “오렌지 두 개”라고 하거나, “담배, 에쎄 라이트!” 하는 식으로 반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기분 나빴다. 저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무슨 근거로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걸까. 과연 내가 덩치 크고, 사납게 생긴 남성이었어도 저들이 내게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단골손님 중에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레인지로버 이보크 블랙을 타는, 6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있다. 이 사람 역시 늘 “담배, 던힐”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가 내게 반말을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의 반말로 인해 상-당-히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이 불쾌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 받은 대로 돌려줘버리자. 똑같은 반말로!’ 이렇게 나의 반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던힐? 몇 미리?”
- “6미리”
- “몇 개?”
- “한 개만 줘.”
이제 그의 반말에 나 역시 반말로 답한다.
지금에 와서는 반말을 한다는 게 별일 아닌 것만 같지만 이 역시 처음에는 얼마나 낯설고, 어렵고, 심지어 무섭고, 떨리기까지 하던지. 만약 그 사람이 나의 반말을 듣고 화를 내며 소리치고 욕을 하면 어쩌지? 어디 감히 어른한테 반말이냐고 따져댄다면 나는 죄송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당신이 먼저 반말했잖아,라며 반말로 대차게 응수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펼쳐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단 당장의 불쾌함을 떨쳐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반말을 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오만가지 걱정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내가 질 수밖에 없던 게임이란 깨달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의 말로 인해 내 기분은 엄청 불쾌했지만, 그는 나로 인해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는 애당초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인지라 본인이 상대를 향해 그 선을 지키지 않고, 상대 역시 본인에게 그 선을 지키지 않아도 타격감이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는 간혹 커피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이 집은 쿠폰이 없느냐며 자기가 얼마나 많이 사 먹는데 벌써 공짜로 몇 잔을 먹었으리라 호언장담하곤 했다. (물론 이것은 허풍에 가깝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입을 틀어막기 위한 최선의 대꾸라고 생각하며 나는 알바라 권한이 없으니 사장님께 문의해보시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답을 못 들은 마냥 올 때마다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기 일쑤였고, 그러다 마침내 사장과 그 사람이 마주쳤다.
엥? 이게 무슨 일이여? 그 사람은 사장 앞에서 세상 사람 좋은 웃음을 선사했고, 심지어 자기보다 한참 어린 그에게 사랑의 눈빛을 담아 “어우, 잘 생기셨어. 미남이야, 미남!”이라며 아낌없는 찬사와 반말이지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던가,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층적인 존재였다. 그는 예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본인이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될 때만 취사선택하며 예의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일하며 실감한 것은, 덩치가 크지 않고 사나운 인상이 아닌 그냥 ‘남성’이기만 했어도 매일같이 겪는 불합리한 대우를 덜 받았을 것이고, 심지어 덜 격분하기까지 했으리란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데 나의 존재에서 그 원인을 찾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 괴롭다. 사실 나는 반말을 하면서도 싸움의 소지를 주고 싶지 않아 감정을 덜어내고 공격적이지 않은 말투와 사납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얌전하고 애교 있고 귀엽게 봤을까. 나는 왜 당신의 반말에 불쾌하다, 어디서 처음 본 사람한테 반말이냐, 내가 우습냐라고 말할 수 없었을까. 야속하게도 이 이유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직간접인 경험이 내 심장과 피부에 아주 깊숙이 녹아 머리를 이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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