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여름의 재미
- 예민한 알바생: 조이(연재 종료)
- 2019. 12. 5. 12:57
매장 오픈을 위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일은 참 힘겨웠다. 이른 기상을 위해 전날 10시 정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늦잠에 대한 걱정과 긴장으로 새벽 한 시 반, 두 시 반, 세 시 반, 네 시 반… 새벽 내내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평소 나는 머리만 대면 잠에 들어 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잠의 질이 좋았다. 잠의 질이 떨어져 겪는 고통은 상당했다. 출근 시간에 대한 긴장으로 어떻게 출근까지는 해내도 도무지 노동을 할 힘이 나질 않았다. 자꾸 몸이 밑으로 축축 쳐졌고, 속이 늘 답답했는데 나른한 몸과 달리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차듯이 맥박이 빨랐다.
게다가 늘 결리고 뻐근한 허리 치료를 위해 난생처음 P.T.를 하고 있던 터라 일곱 시간의 노동이 끝나면 또 정신없이 헬스장으로 가야 했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수면에 집중하는 게 건강에 우선인 것 같아 결국 운동을 포기했다. 근무시간도 오전 근무에서 오후 3시~10시인 오후 근무로 변경했다.
공부를 하며 남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나 해볼까, 했던 처음의 계획은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체력을 과신했고 욕심이 과했다. 그 일 말고도 상속 절차를 위해 법무사를 만나는 일, 주말에 하는 또 다른 일, 끝이 없는 가사노동이 산적해 있었으니까. 가족에 대한 헌신과 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일상이 묵묵히 받아들여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달래가며 늘 부지런히 움직였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지난해 동안 포도와 많이 가까워졌다. 포도 꽃은 사과나 배, 매실이나 모과 꽃에 비해 그 향과 생김새가 참 은은하다. 손가락 두 마디보다도 작지만 나름 포도송이 모양을 한 꽃봉오리들은 꽃을 잠깐 피웠다가 이내 열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지고 만다. 손가락보다도 작았던 이 송이는 몇 번의 비를 맞으며 또 제법 자라 살짝 쥔 주먹에 얼추 감싸진다. 이때가 되면 손으로 조물조물해 준다. 태어난 지 백일 정도 된 아기에게 도리도리, 잼잼 놀이를 하듯이 포도에게 바로 이 잼잼을 해 준다. 손안에서 아기를 다루듯이 살짝 쥐었다 펴준다. 아직 송이가 작을 때 이 작업을 해 주면 포도 알이 솎아진다. 하나하나 일일이 감싸 쥐었다 폈다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이 작업은 어이없게도 귀여웠다. 포도가 아직 어려 여리여리할 때는 이 작업으로 알이 솎아지는데, 약간의 늦장을 부리다가 비를 한두 번 맞히고 나면 알이 부쩍 자라 이 작업으로는 알이 솎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한 송이씩 붙잡고 안쪽에 있는 알을 하나하나 따 주어야 한다. 이 알 솎음 작업을 하지 않으면 속에 있는 포도 알이 안 익거나, 알이 너무 많아서 터져 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알솎음 작업과 곁송이도 함께 따내며 송이 모양을 잡아줘야 한다. 이때 한 가지에 포도는 최대 두 개까지만 두고 나머지는 똑똑 떼낸다. 이 작업 후에는 봉투를 씌어준다. 봉투는 한 쪽 면에 포도 그림이 인쇄된 흰색인데 그림이 없는 면이 바깥을 향하게 싸야 한다. 송이에 봉투를 쓱 올리고 옆에 있는 철사를 삥삥 둘러준다. 철사를 떼서 감는 게 아니라 봉투를 씌어둔 채 떼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감는 것이 포인트다. 또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곁순도 따주고 덩쿨손도 따줘야 한다. 순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하게 또 인상적으로 다가온 작업은 잎의 수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포도 한 송이가 적절한 시기에 잘 익기 위해서는 열두 장의 이파리가 필요했다. 만약 가지에 두 송이가 매달려있다면 적어도 스무 장의 잎이 필요한 것이다. 이게 잘 이해가 안 됐다. 이파리가 좀 더 적어야 햇빛을 더 잘 받아서 더 잘 익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장님은 과일이 익기 위해서는 햇빛뿐 아니라 뿌리를 통해 흡수된 양분이 필요한데, 어느 정도의 이파리가 있어야 이 양분의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고 하셨다. 뭔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왜 과일이 익기 위해 햇빛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공을 들인 포도는 평소보다 이른 추석이 왔음에도 추석 전에 잘 익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일기(日氣)와 절기(節氣)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농사가 적성에 꽤 잘 맞았다. 직판이 아니고서는 품삯도 건지기 어려워 농사로만 먹고 살 수 있을지는 묘연하지만,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작물들을 마주하며 큰 보람과 재미를 느꼈다.
농사로 고된 육체노동을 하다가 편의점으로 출근하는 길엔 나도 모르게 ‘쉬면서 돈 벌러 가야지.’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근무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많지 않은 손님덕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날 좋은 여름날,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젖히고 창밖 나무와 하늘에 시선을 두며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포도 농사와 아르바이트의 여유로움, 그 재미로 지난여름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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