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니면 '꽝'이 들어 있는 상자: <아멜리에> by 이소

   아멜리에는 내가 무척 애정하는 영화다. 크리스마스보다 따듯한 색감부터 치밀한 듯 어리숙한 아멜리에까지 하나, 둘, 셋, 열까지 마음에 든다. 만약 나에게 영어 이름을 지으라면 아멜리로 정할 생각이다. 이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문을 적을 예정인데, 이 글을 읽는 이가 영화 ‘아멜리에’의 매력을 한 자밤 정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광대 같은 사랑스러움]


    물수제비를 던지는 순간, 크렘 브륄레의 설탕 껍질을 숟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깨뜨리는 순간, 지금 이 순간 오르가슴을 느끼는 이가 몇 명일까 세어보는 순간. 아멜리에는 세상을 오밀조밀하게 구경하곤 한다. 아멜리에는 어릴 적 심장병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학교도 다니지 못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늘 외로웠다. 북적이는 사람 곁에 있어 본 적도 없으니 자신이 혼자인 것도 인지하기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허공처럼 비어있는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채울 뿐이다. 아멜리에는 외로움을 등에 진 채 즐거울 수 있는 자신만의 처방전을 발견해냈다. 예를 들어 곡식이 가득 담겨있는 바구니에 손가락을 푹 쑤셔 넣어 가득히 시원한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거의 혼자 하는 놀이다. 아멜리에는 주요한 순간 입술에 힘을 주고 눈썹을 예리하게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혼자만의 무대에서 내가 나의 관객이 되어 그 소소한 순간을 자축한다.


    나는 어떻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가. 어릴 적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앉아 몇 시간이고 넋 놓기도 하고 그림 그리고 색종이 접으며 시간을 보냈다. 요즘엔 그저 누워서 스마트폰 하는 게 다인 듯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는가 드라마를 보는가 다큐멘터리를 보는가 그 차이만이 있을 뿐. 귀찮은 게 많아지다 보니 외로울 때면 습관적으로 액정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아멜리에처럼 혼자 배우이자 관객이 되는 작은 무대를 만들어 보고 싶다. 외로울 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방을 만들고 싶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마음엔 결핍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후 죽은 남편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마음으로 잊지 못하고 있고, 채소가게에서 일하는 순박한 청년은 그 어리바리함 탓에 가게 주인에게 매일 수난을 당하지만 그 앞에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거리가 된다. 또 어린 시절 비밀 공간에 보물을 모으곤 했던 아저씨는 관계가 서먹해진 자식에게 말을 걸기 두려워하고, 카페 단골은 애인을 스토킹하는 버릇을 지녔다. 철저히 관찰자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잊으면 되는데 하면 되는데, 등장인물들은 그걸 못해서 끙끙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도 누군가 지켜본다면 삼류 코미디라 할 것이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마음인지라 우리는 늘 어설프게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큼은 나는 이미 시간 관리의 귀재가 되어있을 터인데 현실은 조금 행복한 나부랭이일 뿐이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나만 그렇지 않다는 점이 좋다. 불규칙한 크기에 삐죽빼죽 홈이 나 있는 돌멩이를 가득 쏟으면 돌멩이들끼리 서로의 틈새를 채워주는 것처럼, 사람들의 불완전함이 맞물려 일상은 그래도 무사히 돌아가고 있다.


[연민과 친절의 그림자]


    아멜리에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보다 보니, 아멜리에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장면에서 나도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멜리에가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남몰래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의 가슴을 사랑으로 채운 후, 정작 자기 자신의 사랑은 매정하게도 부서졌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다. 아멜리에는 자신을 세상에 상처받은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묘사한다. 아니 사실 원래부터 아멜리에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큰 만큼 실망도 클 것이기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상대를 탐구하며 몰래 사랑을 전했을 터였다.


    모두에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애정받고 싶은 마음은 숨긴 채, 다른 이에게 그 애정을 베푼 경험.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람들은 내가 쏟는 친절에 별 관심이 없던 경험. 아멜리에가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베개를 꼭 껴안고 눈물 흘리던 순간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타인에게 건넨 미소가 언젠가 내게 돌아올 거라 소리 없이 기대하던 마음이 그 정체를 드러내며 터져버린 순간이었다. 자기 연민이란 감정은 때로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는 점에서 자의식 과잉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으며 평가 절하당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 쪽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품는 짝사랑을 아플 수밖에 없다.


[두려움보다 앞선 마음]


    아멜리에가 사랑에 빠진 이 앞에 입술을 가져다 댈 때, 나는 그가 강해졌음을 느꼈다. 영화 초반 아멜리에는 호기심이 가는 이에게 얼굴도 보이지 못하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인질로 삼고는 작은 단서만 흘려주며 술래잡기하듯 만남을 질질 끌었다. 아멜리에답게 그가 간절히 찾고 있던 수수께끼의 사람을 몰래 찾아주기도 했다. 그가 흉포한 사람이 아님에도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도 없는 그를 향해, 혼자 마음을 열심히 키워간 걸 생각하면 아멜리에에게도 무모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아멜리에가 사랑 혹은 '꽝'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기 두려워하는 모습이 좀 유난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사람 관계를 쉬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건 항상 위험이 따른다. 상상하던 대로 흘러가는 대화는 없고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내 존재마저 휘발되는 기분이 든다. 사람을 만날수록 관계를 무사히 이어가는 데엔 능숙해지지만, 속마음을 꺼내고 민낯을 보이는 건 두려워하게 된다. 숨어다니던 아멜리에처럼,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며 이리저리 잰 후에 마음을 건넬 때도 있다.


    내가 아멜리에였다면 그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 거절당하고 미움받을 용기가 부족하다. 아멜리에를 보고 나는 어쩌면 두려움을 없애기란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면서, 그보단 간절함이 커지면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아멜리에는 입술을 가져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두려웠을 것이다. 다만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마음에 응답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illust by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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