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보편적 사랑: <가장 따뜻한 색, 블루> by 지혜

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옳은 명제

    사춘기 때, 세계문학을 읽을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쿵쾅쿵쾅 뛰었는지 모른다. 세기말 마지막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사랑. 사랑, 이라는 이름 아래 탐스러운 사과같이 포장한 그 실체는 대부분 부도덕한 사랑. 「마담 보바리」,「여자의 일생」 등 프랑스 문학을 떠올리면 사랑에 미쳐 파멸하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때는 자신을 불싸질러 누군가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러웠지만, 이제는 그저 웃음만 나오는 그 이름. 아무튼 내게 프랑스 문학이란 사랑 이야기의 결정체이자 위험하고 자극적인 구애의 서사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첫 장면은 모두 따분해하는 문학 시간에 오로지 아델만이 <마리안느의 일생>을 곱씹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의 불행을 예감했다. 찬란하고 아름다울 불행을.

    문학을 배우고 날씨가 좋았던 그 날에 아델은 횡단보도에서 파란 머리를 한, 여자와 여자끼리 아주 다정한 모습의 엠마를 보며 첫눈에 반한다. 엠마 또한 맑고 투명한 아델을 스쳐 지나가며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성과의 성애가 어딘가 불편했던 아델은 그 후 엠마가 있을 만한 게이바를 찾아다니고 결국 둘은 서로의 끌림을 수용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너무나도 옳은 명제로써 소비해오던 이성애 로맨스 서사는 여성 퀴어의 로맨스 서사에서도 이토록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게 부합됐다.


이토록 보편적인 사랑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함께 만나 데이트를 하고, 여느 불타오르는 연인이 그러듯 격렬한 섹스를 한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을 나눌 수 있고 눈만 바라봐도 아주 깊게 농축된 애정을 확실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

    그렇지만 조금씩 마주치는 다른 지향점들이 있다. 가령 중산층에 속하는 엠마는 순수예술을 공부하며 현실보다는 자신의 꿈을 좇아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님에게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고 부모님의 지지를 받는 반면, 아델은 딱히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 없어 꿈이 없다. 빠듯하게 살아가는 집안 환경에서 꿈보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하며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의 말에 긍정한다. 또한, 엠마를 철학을 가르쳐주는 선배 정도로 소개한다. 관계가 오래될수록 너와 나의 다른 가정환경과 가치관은 결국 서로를 외롭게 한다.

    아델은 엠마의 자유와 그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다름을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육체적 외도를 저지르게 된다. 더이상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하 동문. 둘은 이별하게 되고 아델은 엠마를 눈물로 붙잡아보고 용서를 빌지만 이내 각자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결국, 여느 연인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사랑의 구도인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본 영화를 퀴어 영화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퀴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델이 엠마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성장하는 모습에 초점을 둔다. 혹은 자유에 대한 상징성이나 계층의 차별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랑은 말마따나 여타의 동일한 사랑인 것이다. 이성이 아닌 동성끼리의 사랑도 이렇게 애틋하고, 아련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고. 동성애는 정신병이나 과거의 트라우마나 상처로 인해 파생된 것이 아니라고. 처절함과 비참함 등 수백 가지의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게다가 많은 찬사를 받는 이 영화가 퀴어의, 그것도 여성 퀴어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직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만, 여느 이야기보다 더욱더 세밀하고 풍부하고 찬란하게 그려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어느 날은 퀴어 당사자가 <아가씨>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영화에 나온 것처럼 섹스하지 않는다고. 영화를 보고 여성 퀴어의 섹스에 대한 환상을 가질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전히 <아가씨>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그 문제점은 여전히 동일한 선상에 있다.

    원작자는 아델과 엠마의 섹스 장면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고, 엠마 역할을 맡았던 레아 세이두는 감독의 가혹한 노동력 착취를 문제 삼았다. 가령 둘이 신호등에서 처음 만나 우연히 스치는 장면만 해도 종일 촬영했다고 말했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하루가 걸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델 역할을 맡았던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몸 역시 또 하나의 분장 상태라고 스스로 되뇌며 촬영에 임했다. 힘들었던 건 섹스 신 자체가 아니었다. 다른 모든 장면처럼, 너무 오랫동안 촬영이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옷을 챙겨입고 나가고 싶어지더라."(씨네21 인터뷰)

    이쯤 되면 감독은 그들의 섹스 장면 또한 배우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요구했다는 말이 성립된다. 심지어 감독은 성폭행 혐의로 피소됐다.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결과는 이토록 보편적 사랑의 이야기인데, 그 과정은 늘 보편적이지가 않다.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정작 당사자는 똥통에 쳐박혀 있다.

    오늘도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겁난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 감독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은 아닌지, 문제가 된 감독의 영화를 또 다시 소비해도 되는지 헷갈린다. 그저 다양한 사람의 영화가 올바른 시선을 가진 이의 눈을 통해 이 세계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illust by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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