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이야기로 바꾼 두 사람, <캐롤> by 정연


    점심에 라멘집을 찾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당.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한술 뜨려는데 문득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왔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그건 올해 겨울의 첫 캐롤이었고, 돌아온 사무실에서 종일 ‘한국인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 메들리’ 같은 것을 돌려 들었다. 이제 겨울이구나. 캐롤이 들려오면 진짜 겨울 같고 크리스마스 같다.


    겨울이면 영화 <캐롤>이 빠짐없이 생각난다. 2016년에 개봉했으니 이제 네번째 해인가. 사진 작가 사울 레이터를 참조했다는 몽환적인 화면과 컬러감, 1950년대 뉴욕 사람들의 착장.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뜬 시점에 케이트 블랜쳇과 루니 마라가 만나는 연기라니. 영화가 얼마나 흥행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겨울마다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건 겨울 같고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다.


테레즈에게 물어보는 캐롤


    캐롤은 테레즈에게 늘 무언가를 묻고는 그 대답을 의미있게 들어줬다. 처음 만난 순간, 백화점 판매원으로 근무하는 테레즈에게 ‘어릴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이내 그 물건을 구입했을 때부터 그랬다. 답례로 식사를 살 땐 테레즈의 이름과 성의 기원에 대해 물었고, 집으로 초대해서는 사진작가가 꿈인지 물었다. 다음 만남에 캐롤이 테레즈에게 카메라를 선물하고, 그 선물 안에 캐롤이 담겨, 영화 말미에 테레즈를 꿈꾸던 직장으로 이끈 것도 상징적이다.


    어른스러운 인물인 만큼 현실적인 제약도 많다. 캐롤은 이혼 소송중인 남편에게 냉담하나 딸아이의 양육권만큼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성애 치료 상담을 받거나 시부모 앞에서 남편과의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등 현실에 순응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엔 아이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캐릭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별 편지만 남겨두고 여행 도중 뉴욕으로 돌아갔을 땐 비극적이라기보단 좀 이기적이다. 더 앞으로 돌아가, 집으로 찾아온 남편을 돌려보낸 후에도 묘하게 테레즈에게 차갑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테레즈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어른이려는 마음이 테레즈를 가장 외롭게 했을 거다.


캐롤에게만 답하는 테레즈


    영화 초반 테레즈는 우유부단하다. 유럽 여행을 가자는 남자친구 리차드의 제안에 ‘너무 추워서 대답할 수가 없다’고 얼버무리거나, 친구인 대니가 급작스레 키스를 할 때도, 캐롤의 식사 메뉴를 그대로 따라 주문할 때도 그랬다.


    헌데 되짚어보면 테레즈가 대답을 망설이던 것들은 모두 마음이 없던 것들 뿐이었다. 말하자면, 남자들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한 건 테레즈의 탓이 아니다.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캐롤의 제안에, 작품 사진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심지어는 크리스마스에 서부 여행을 함께 가자는 말에도 테레즈는 좋아요, 그럼요하고 단 번에 대답한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고 어딘가 이상해서’ 새나 나무를 찍는다던 테레즈의 카메라에 캐롤이 담기기 시작한 건 그래서다.


그리고 일방적인 남자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일방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테레즈의 남자친구인 리처드는 헌신적인 듯 하나 눈치가 좀 모자라고 제 계획만 안다. 사진 작가를 준비하겠다는 테레즈에게 ‘유럽 가는 건 생각해 봤냐’고 불쑥 묻거나 ‘너 때문에 좋은 집, 좋은 직장으로 옮겼다’고 소리친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계획에 테레즈의 의견은 없다. 그런가하면 캐롤의 전 남편 하지는 영화 내내 떼쓰는 어린 아이처럼 군다. 아직도 어머니와 분리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캐롤을 사랑한다면서도 자신이 선물한 향수를 쓰는지도 모르는, 아이의 양육권으로 전 부인을 협박하는 치졸한 사람이다. 대체 남자들은 왜 이렇게 남의 말을 안 들을까?


    서부 여행 중 테레즈와 잠깐 말을 나눈 잡화상 남자도 영 재미있다. 남자는 여성을 위한 반짇고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잡지를 가지고 있지만, 테레즈가 말한 립스틱이나 파퓰러 포토그래픽 같은 건 없다. 그가 가진 것 중엔 주인공 둘이 원하는 건 없었다는 거다. 그들이 보는 여성이란 얼마나 단편적이고 평면적인가.


재회의 순간


    여행 후 둘은 결국 멀어진다. 테레즈는 캐롤을 담은 사진을 넣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뉴욕타임즈에 사진 기자로 취직하게 되고, 캐롤은 딸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한 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액자식 구성을 따라 다시 첫 만남으로 돌아온 화면. 함께 살자는 캐롤의 제안을 처음으로 거절하고 돌아선 테레즈의 얼굴이 또 다시 유리창에 어린다. 파티장을 떠나 캐롤을 찾아갔을 때 테레즈의 시점을 담은 카메라워크는 전에 없이 흔들리고 어지럽게 불안하다. 마침내 캐롤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서야 카메라는 다시 고정되고 두 사람은 웃는다. 처음 만난 날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고 영화는 끝이 난다.


    포스터의 메인 카피처럼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 테레즈와 캐롤은 첫 만남의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봤고, 그 순간을 두 사람이 이야기로 바꿔 밀고나갔다. 영화를 처음 본 그 겨울엔 사랑을 깊게 앓은 테레즈에 공감했는데, 다시 보니 현실을 놓을 수 없던 캐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마음이 조금 늙은 걸까. 오늘은 이불을 꼭 덮고자야겠다.


illust by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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