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라는 만월滿月에 대하여, <윤희에게> by 연

    윤희에게.


    겨울이 되어서일까, 얼마전 다시 본 영화 ‘캐롤’ 때문이었을까. 찬바람 때문에 눈물이 고일 때쯤 뭔가에 떠밀리듯 ‘윤희에게’ 영화를 보았다.

    사실 저번 리뷰도 퀴어영화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다른 주제를 고르리라 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를 고르던 중 마침 친구가 이 영화를 추천하는 글을 보았고, 마침 전국에 몇 없다는 상영관이 집에서 가까웠고, 그러면서 그래, 여성서사 이야기니까 괜찮으리라-라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자기 위안을 안고 리뷰를 적어 내려가본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분명 나조차도 기억을 더듬어 유년시절을 회상해보았을 때 사랑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때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애달팠는지 왜 나의 시선은 항상 그 애를 쫓아갔었는지 그 애가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는 왜 그렇게 수많은 밤을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었는지. 그렇게 우리는, 많은 감정들이 사회적 통념 안에 절제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테로로맨틱을 포함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절제 당하며 살아 왔을까. 그렇게 영화 ‘윤희에게’는 자신을 잃어버리도록 강요받고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영화의 배경인 오타루에서는 장면 내내 눈이 부단히도 쌓인다. 극중 인물 중 고모는 눈이 그치길 바라며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라고 자주 말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려 들지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불친절한 영화 혹은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설명이 필요한 사랑도 있지만 때로는 막을 수 없는 눈처럼 내려와 계속해서 그리움을, 애정을, 슬픔을 쌓이게 한다.

    눈은 쌓여가는 막막한 사랑이면서, 사회적 편견에 의해 켜켜이 쌓여온 그녀들의 삶의 비밀이 아니었을까.


    새봄과 윤희, 준과 준의 고모


    또한 영화에서는 극 중 사람들의 연대가 빛난다. 서로 생각하고 존중하며 때로는 자유롭게, 어쩌면 무심한 듯 섬세하게 각자의 방식으로 연대한다.

    새봄의 경우 엄마와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 그러했다. 극의 초반부에서 새봄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고, 혹여나 자신이 엄마와 동떨어진 존재이지는 않을까(엄마와 닮지 않은 것 같다-등등) 불안해한다. 그러다 엄마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고 엄마와의 여행을 기획하면서 조금씩 새봄은 엄마와의 관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것만 찍’는 새봄이 여행 중 엄마를 찍던 장면은, 그래서 나에게는 한 편으로는 ‘아름다운’ 엄마에게 닿지 못해왔던 새봄의 순간들이 눈처럼 쌓여만 왔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듦과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럼에도 엄마와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 하는 새봄의 강한 내면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마냥 슬프지도, 마냥 따스하지도 않은 오묘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새봄은 적극적으로 윤희와 준의 만남을 가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윤희의 곁을 지키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에서 나는 전에는 일정거리 밖에서 엄마를 지켜보던 새봄이 점차 그녀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새봄뿐 아니라 준의 고모 역시 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준의 책상에 쌓여만 가던 편지를 윤희에게 보냄으로써 ‘눈이 쌓여만 가는 것’에 변화구를 주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육체적으로는 준이 없으면 눈을 치우는 것이 점차 힘든 나이일지 몰라도, 또한 관계적 측면에서는 쌓여가는 눈을 생각하고, 또 그 눈이 그치기를 기원해주는 조력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준과 고모는 눈이 매년 깊이 쌓이는 그 동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따스한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원래 영화의 제목은 ‘만월(Moonlit Winter)’이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제목이 만월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일본에서 달은 은유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단다. 예를 들어 ‘달이 이쁘네요.’라는 말을 ‘사랑합니다.’로 사용한다고 한다. 만월은 윤희와 준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중 인물들 간의 신뢰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애정 역시 의미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존중하고, 또 때로는 거리 밖으로 밀려나면서도 관계를 놓지 않으려 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바로 그 관계들이 ‘만월’을 뜨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초승달에서 보름달(만월)이 되어가듯, 어디에 가려지지 않고 온전히 들어낼 수 있는 보름달처럼, 윤희와 준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또 다시 ‘나’를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다시 나 자신으로 차오를 수 있기를.

    모든 여성이 빛을 잊지도, 잃지도 않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illust by celloph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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