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쓰는 어려움

   언젠가부터 두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만남이 성사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20대 초반에 시작한 인연을 지금껏 이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같은 업계에 있지 않고 같은 고충을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만나지 않으면 생각나고, 생각하다 보면 만나고 싶어지고, 만나고 싶으면 서로의 노력으로 만남을 성사할 수 있는 것 자체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그와의 관계 맺음에서, 언젠가 반드시 만나질 것이라는 확신과 안정감을 얻는다. 게다가 그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내가 쓰는 글을 기꺼이 읽고 진솔한 감상을 종종 전해 주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언젠가부터 나는 쓰기가 어려워지면 그를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그를 만난다고 해서 무언가 명확한 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답을 요구하기 위해 그를 만나려 하지 않고, 그 또한 그런 종류의 답을 전하는데에 있어서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으레 친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나눈다. 무엇을 하며 살았고,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일을 하려 하는지, 그런 근황 보고 같은 대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나누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그러나 쓰는 일을 오랫동안 지속해 온 사람의 담담한 태도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면 나의 쓰는 태도를 반추해 볼 시간을 얻을 수 있다.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만은 얻어지지 않는 귀한 시간이다.


    공개적이고 개인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쓰고 기획하는 노동자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보는 이를 설득하려는 용도가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모두 한 편의 글이 맞지만, 내가 쓰고 싶거나 나만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은 아니었다. 그 글의 화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고용한 회사였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다. 물건들이 내 손을 통해 조립되어 지나가고 나면, 그것은 내 물건이 아니라 회사의 물건인 것이다. 그 글들이 내 손을 통해 나와 회사의 이름을 달고 용도를 다하고 나면, 내 손에는 글이 아니라 임금이 남았다.


    근래 들어 쓰는 글들은 그때의 글과는 많은 면이 다르다. 낯설고 힘들고 재미있다. (이 둘을 차등하려고 다르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래의 글들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과 더 면밀히 만난다. 써야 해서 쓰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는 내놓을 수 없었던 그간의 말들을 위해 쓴다. 그만큼 더 엎드려 속을 살피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렇게 살펴 글감으로 골라지는 것들은, 주로 내 속을 점철하고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경유하며 발생 된 불안들이다. 그렇게 골라진 만큼 과거만큼의 미진함이 배어있고, 해결되지 않은 채 응어리 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글을 마치기까지의 시간은, 그 모호 투성이인 불안들 사이에서 그나마 명확한 모양인 것을 알아보고 골라내어 문장으로 끄집어내는 시간이다.


    이 시끄러운 속 얘기를 시끄럽지 않은 어투로 다듬어 내는 것이 내 쓰는 어려움의 지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주로 이 하얀 여백에 뭘 채워야 할지 몰라서 두렵기도 하다는데 근래의 나는 오히려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글이 얼른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다발적으로 너무 많은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중 무엇도 명확히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개중에 명확히 들리는 것을 골라서 문장으로 내놓아도 흡족한 경우는 극히 적다. 내가 그 시끄럽고 동시다발적인 불안들이 부담스러워서 성급하게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문장이 된 이야기들은 내가 원래 쓰고 싶던 글의 형태와 자주 동떨어진다.


    그런 식으로 동떨어진 글을 아쉽게 마무리하고 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글을 좋게 읽어주고, 본인의 진심을 종종 나에게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담긴 말들을 받으면 당연히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말이 모자랄 만큼 감사하다. 그런 말들 덕분에 매주 쓰고자 하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않고도 충분한 척 닫아버린 글들이 누군가에 의해 수고롭게 읽혀지고 마음에 가 닿았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위선자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고민을 조금 덜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조금 덜 써도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전에 생각했던 글의 형태와 조금 동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 타협하고 편해지려는 게으른 마음도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다 내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미숙하고 태도가 덜 여문 작업자여서 생기는 일이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손이 나가는 대로 쓰자고 생각했었다. 읽히기를 고민하기보다는 여과를 최소화하고,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결과물로써의 글보다 과정으로써의 글을 쓰고 싶었다. 글쓰기의 과정을 살며 더욱 단단하게 자문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격주 연재를 선택하지 않고 매주 연재를 선택해 촉박하게 쓰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생각할 시간이 촉박할 만큼 힘든 글쓰기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썼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스스로 속이는 글을 쓰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글을 이끌어가고 마무리할 때 너무 많은 힘을 썼다. 내가 읽히기를 바라지 않으며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상태여도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주변인들은 응원하면서도, 분풀이하듯 글을 쓰는 내 모양새를 보고 걱정을 내비쳤다. 그렇게 스스로와 싸우듯이 쓰다가 네가 망가질까봐 겁이 난다. 나도 겁이 났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는 겁이 나지 않는 척을 하며 힘을 아꼈다.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글쓰기로 완결 지은 척했다. 고민을 끝낼 힘이 없으면서도, 혼자서 잘 살아낼 힘이 없어 두려우면서도, 고민하고 혼자서 잘 살아내겠다고 쓰고 마무리를 지었다. 실제의 나는 그만큼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 아닌데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꼭 그렇게 쓰고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도 그렇게 쓰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래야만 마무리 같았다.


    비슷한 형태로 작업하는 작업자-혹은 작업자 지망생-들이 쓰기나 그리기나 만들어내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면, 나는 그 어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쓰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쓰지 못했으면서 무슨 속 편한 소리를 하며 남들을 가르치려고 들었는지 의문이지만, 구차하게나마 자기변명을 좀 하자면 그런 말을 하고 다닐 당시에는 나도 내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제야 알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반성하는 중이다. 최근 들어 종종 이전에 쓴 글들을 복기하다가 그 성급한 마무리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낯이 조금 뜨겁고 간지럽다.


    이 반성은 스스로 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나보다 더 진지하게 나의 글을 복기하고 혹시 글을 조금 급하게 쓴 것은 아닌지, 조금 더 써야 할 것 같은데 도중에 지쳐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주고 걱정해주고 감상을 들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하게 된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글 쓰는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불편과 정도 이상의 불안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개인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며 얻은 것을 하나 말해야 한다면, 나는 그 하나가 이러한 태도의 변화라고 말하겠다. 이전의 글쓰기에서는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완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완결이 아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잊지 않고 계속 되새기는 것이다. 한 편을 연재하며 이 안에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무엇인가, 그 하나만을 생각하는 진솔한 태도가 왜 나에게 중요해졌는지를 계속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해진 이유는 나의 욕망 때문이다. 내가 외롭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가서 닿고 싶고, 그러기 위한 도구로써 글을 선택했기 때문에 중요해진 것임을 계속 상기해야겠다. 쓰느라 몰입하고 지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쓰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자주 오기 때문에, 언젠가 나는 또 반성과 태도를 뒤로 하고 예전으로 돌아가 성급하게 마무리 짓는 글을 쓰며 껄끄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날은 반드시 다시 올 테지만, 나는 오늘 마침내 쓰는 어려움에 대해서 썼으므로 ‘과정으로써의 글쓰기’가 잘되지 않을 때마다 오늘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는 그렇게 반성하며 쓸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글을 쓰고 있다.


    쓰는 어려움이 해소되는 날이 언젠가는 올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그 고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속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다. 언젠가 투쟁이나 쟁취 같은 단어를 습관적으로 쓰지 않고도, 거대 담론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도 담담하게 개인인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과거를 뒤적여 연료로 쓰지 않고도 현재의 삶을 지속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과거를 빌리고 이론을 빌리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거는 글을 쓰고 싶다. 이 쉽지 않은 글쓰기가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 되면, 나는 온전히 살아있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길이 보일 때까지,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며 쓰는 어려움을 내려놓지 않기를, 감사하는 마음이 어려움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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