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직면의 어려움 (1)

    근래에는 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2월 말쯤인가부터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프로젝트가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구체화 된 게 6월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프로젝트를 같이 할 만한 주변 지인들을 끌어모으고, 현재까지도 기획과 마음가짐을 구체화하고 있다. 내 행동이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아주는 좋은 지인들 덕에 꽤 좋은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덕분에 나를 재촉하지 않는 사람들과, 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생각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나를 재촉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마침내 실행을 앞둔 시점인지라 여기에다가 어떤 내용의 작업인지를 상세하게 쓸 수는 없지만, 타인과 타인이 대면하고 나와 내면이 직면하는 경험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내면에는 공간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공간을 그릇이라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그저 공간이라고 말한다. 근래에는 경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생각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은 그릇을 넓히거나(혹은 넓어지거나), 공간을 허물었다 다시 짓거나, 넘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경험과 확장이 언제나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즐거운 일이면 좋겠지만, 그런 일들이 즐겁게만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다. 나를 변화시키는 경험은 대부분, 외부에서 나의 의사와 상관없는 자극으로 다가온다. 그릇을 깨고 공간을 관통하고 경계 밖으로 나를 거칠게 잡아당긴다.

    자발적인 경험에서 야기되는 변화 또한 기존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양의 불안을 재료로 한다.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불안, 무엇이 변화하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여겨질 때의 불명확함, 내가 직면하게 될 나의 내부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등. 그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거나 경험하고 감각하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본인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성장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불안을 야기하는 행동을 거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변호하며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면은 복잡한 양상의 활동이다. 어떤 이들은 살기 위해 직면을 피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살기 위해 직면에 매달린다. 어떤 이들은 나의 그릇을 부수어버릴 듯이 들이닥치는 외부의 경험 때문에 강제로, 최초로 스스로와 직면하고 상처 입지만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직면의 경험과 경험을 이끌어 줄 안내자를 찾아 나선다. 이 모든 양상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고, 내가 적지 않은 다른-개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꽤 여러 양상으로 직면을 경험하며 여태껏 살아있다. 강제적이며 필연적이기도 하였고, 자발적이며 탐구적이기도 하였다. 나는 성폭행 피해자가 되면서 나의 몸과 거칠게 직면했고,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비밀을 만들면서도 직면을 했다. 이전 연재분인 <어떤 우울에 대하여>에 적은 것처럼, 우울을 알기 위해 일기를 쓰며 자발적으로 우울과 직면하는 경험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나는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내면의 문이 안으로 열린다고 생각했다. 내면의 문이 안으로 열려서, 자리에 엎드려 스스로의 안부를 묻고 삶의 결을 살피는 나날이 많아진다고 썼다. 그렇게 쓴 이후의 직면은 살핌이었다. 고통을 뒤적였다가 다시 정리하며 명확하게 하는 보살핌이었다. 그것은 보살핌인 동시에 다툼이고 투쟁이었다. 스스로의 삶이 온전하다고 인정하기 위해, 혼자서 하는 인정 투쟁을 이어가며 나는 여태껏 여기에 있다.

    이 살아남음이 극복이나 치유, 그에 따른 나아짐에서 야기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것은 오히려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하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살아남기, 그 과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듣게 되는 잘 극복했네요, 라는 말이 싫다. 내게는 여전히 많은 양의 불안과 우울이 있다. 내 신체에는 회복되지 않을 결점들이 있고, 사라지지 않을 흉터들이 남았다. 이것들까지 포함하여 기능하는 것이 내가 직면 끝에 얻은 삶의 방향이기 때문에 나는 타인에게 치유나 나아짐, 고침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많은 결점과 불안과 일어났던 사건들을 인정하고 나자 자책하거나 크게 동요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극복과 나아짐을 추구하는 것이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아서 던져버리고 걷는 (혹은,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일과 비슷하다면, 나의 방식은 발바닥에 박힌 가시까지를 나로 인지하고 가시와 함께 끝까지 걸어가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몸에 박힌 가시와 나는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가시가 주는 경험과 그 경험에 따른 감각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이제 나를 솔직하게 거론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 중 무엇이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하는 인정의 방법론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곤두박질쳐서 마음의 끝을 손바닥으로 짚고 다시, 잠영하듯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스스로가 직면하는 행위들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직면과 만남이 장치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어느 부분까지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고민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정 이상 기획이 앞으로 나아가자 나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직면의 경험도, 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도 분명히 내 안에 있었지만 이 경험과 욕망은 타인들이 납득 가능할만한 언어로 정리하자마자 원래의 모습과 다른 것이 되었다. 몇 번을 새로 써봐도 마찬가지였고, 몇 번을 새롭게 말해보아도 그러했다.

    프로젝트는 나의 필요에 의해 기획의 형태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쓰여지고 나면 그것은 나를 포기하고 남을 구하기 위한 장치들을 기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쓰인 글은 내가 보아도 납득이 되지 않을만한 지점들이 여러 곳에 있었고, 고민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프로젝트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 방식으로 계획되었는데, 그 계획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부속품 몇 개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계와 단계가 이어지는 연결성이 희미해 보였다. 타인만을 구할 수는 없었다. 남을 구함으로써 나를 구하고, 나를 구함으로써 주변에 기여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고민을 이어가는데, 정작 기획에서는 ‘나’를 구하는 방안이 보이지 않자 한계에 부딪혀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 몇 달 그렇게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고민을 억지로 이어가다 보니 나는 금세 쇠약해졌다.

    다행인 것은 이 고민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생님이기도 하고, 친구들이기도 하고, 그런 관계 맺음으로 끝나지 않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객관적인 시선과 태도로 기획을 짚어주기도 했고, 본인의 고민이나 견해를 나눠주기도 했고, 본인의 경험담을 나눠주기도 했다. 때로는 고민이 끝나지 않는 상황 자체에 공감해주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부속적인 부분들을 자발적으로 담당해주기도 했다.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타인의 시선을 빌려 나의 언어를 되짚어 보는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입을 열어주고 기다려주는 주변의 사람들 덕분에 나는 쇠약해진 채로도 고민을 놓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것 또한 직면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셈이다. 나는 그간 직면이 개인적인 사건이고, 타인의 관여가 없는 개인의 내부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도움을 받겠다고 결정하고, 기꺼이 도움을 받고, 그러는 과정에서 고민이 이전보다 구체적이고 긴밀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직면은-혹은 직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일은-타인과의 관계함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획을 공개하고 이야기를 듣기 위한 많은 만남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두 선생님과의 만남이 한차례 있었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만남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괜찮음’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 자리에서 촉박해하며 경황없이 이야기했고, 그러는 동안 나의 불안하고 미숙한 지점들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다고 했다. 일상의 문제들을 잘 감당하고 있고, 행복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뿐만이 아니라, 프로젝트 외적으로도 나는 행복과 안정에 대해 고려하며 살지 않는다고 했다. 원함을 충족하는 것이 반드시 행복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고도 말했다.

    선생님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그것은 잘 기능하는 것일 뿐이지 괜찮은 것이 아니며, 만약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괜찮음의 기준을 낮춘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삶은 많지만, 사람들을 모아 대면시키는 방식의 기획을 하려면 그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의 지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에게 입을 열어 이것이 왜 괜찮음인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고민이 부족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자리가 파하고 나서도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그 자리에 앉아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 그 두 상태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정말로 괜찮지 않을, 그 가능성이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괜찮다고 결론 내리고 덮어놓은 부분들을 다시 펼쳐 읽어야 했다. 괜찮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면 물론 힘들겠지만, 그 부분을 돌보기 시작하는 것으로 다시 고민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다 효과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했지만,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다. 갈피가 잡히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과 이 고민을 말로 나누어 볼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참담한 심경이었다고 회고한다.

    말로도, 생각으로도, 글로도 고민이 이어지지 않는 그런 나날 중에, 아주 우연한 계기로 어떤 참여형 공연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고민했지만 곧 참여를 결정했다. 그 참여가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되어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 공연이 새로 얻게 된 고민거리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고, 다른 참여형 공연 작업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고민을 기획화했는지 보다 섬세한 시선으로 관찰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예기치 못한 장면들과 마주하며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직면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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