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상대를 만나면 이길 수 없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스포츠의 타임라인은 갖가지 예측을 뛰어넘는 플레이의 출현이 쌓아 올려진 레이어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정동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결과가 뻔한 경기보다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한 경기의 결과를 좋아하고, 또 그보다는 강팀이 방심한 틈을 약팀이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보란 듯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포츠의 순간들에 열광한다. 2019 NBA 파이널에서의 배팅률은 골든스테이트가 약 1.5, 휴스턴 로키츠가 약 3.5로 나왔지만 결과는 휴스턴의 승리였다. 예측 가능하지만 결코 불확실한 스포츠가 가진 자질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특히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의 경우 경기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올해의 우승부터 프로 선수의 연봉의 마지막 자리까지 거의 모든 것을 예측한다. 슬램덩크에서 안감독은 강백호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돼,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강백호에게 농구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가 공유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윤리[각주:1]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로 체육관 대관이 어려운 탓에 올해는 국내외의 프로 경기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도 거의 모든 대회가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한 달만 농구를 못해도 몸이 굳어 버리는지(아님) 확실히 탄력이나 순간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지금은 거의 넉 달째 코트를 밟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팬데믹 상황 속에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아마추어 선수들이 정기적으로 농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올해 S리그 경기는 실제로 예측 불가능할 것 같다. 농구를 오래 안 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상황이 장기화 될수록 코트 위의 나에 대한 확신은 사라지는 중이다. 그렇지만 또 나만 농구를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장막 안에 갇힌 예측 불가능한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가에 따라 흥미로운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예선에서 어떤 팀을 만나는지도 중요하다. 예선부터 우승이 기대되는 팀과 만나면 본선 진출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대회 초반부터 기력을 모두 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회는 풀 리그 또는 토너먼트로 진행되며 대진표는 대회 날 당일 아침에 제비뽑기를 통해 채워진다. 팀원 중 한 명이 긴장감 속에서 모든 소망을 담아 알파벳과 숫자로 이루어진 종이 한 장을 뽑는다. 운이 좋으면 실력이 없는 팀과의 경기가 배치되어 본선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운이 나쁘면 당연하게도 잘하는 팀과 경기를 하게 되어 본선 진출은 불투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진표는 언제까지나 대진표일 뿐, 농구 대회에서 예상 가능한 모두의 시나리오란 없다. 스포츠의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고, 꽤 큰 실력 차를 보이는 아마추어팀들이 배치된 대진표의 피라미드는 새로운 부딪침들을 만들어낸다.

    여성 농구 대회가 흥미로운 것은 전국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는 팀은 한 줌, 즉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하루에 모든 경기를 끝내는 대회는 체육관 대관 시간으로 인해 10팀 내외가 출전한다. 여성 농구팀은 대학팀까지 모두 합쳐도 하나, 둘, 셋, 넷, 한 줌이기 때문에 농구 대회에서 여성부를 폐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성팀들은 종종 1등 상품보다 비싸기도 한 참가비(15만원~20만원 사이)를 내고 꾸준히 대회를 나간다. 그래서 서울시 리그에 출전한 팀을 인천시 대회에서 마주치고, 또다시 금천구 그리고 강남구 대회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이미 출전팀이 정해져 있는 프로 리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축적된 데이터로 대진표에서 우승팀의 견적을 내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면서도 확고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상대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아무도 몰라서다.


    3년 전에 한 대회의 예선에서 ‘점프줌마’라는 팀을 만났다. ‘점프줌마’는 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혼여성들, 대부분 40대 여성들로 이루어진 팀이며, 모종의 이유로 2017년 ASAP 대회를 마지막으로 팀 활동을 그만둔다고 했다. ‘점프줌마’에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종종 벤치 테크니컬을 받는 남자 코치가 있었고, 40대 이상의 여성 선수에게 +1점의 어드밴티지를 주었지만, 어쨌든 예선에서 ‘점프줌마’를 만난 것에 올해도 대진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팀은 가드와 슈팅 가드 포지션의 주요한 역할의 주전 두 명이 십자인대 파열로 뛰지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점프줌마’에 우승을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경기를 완전히 망쳤다. 처음부터 풀 코트 맨투맨 수비를 했다면 그나마 체력으로라도 격차를 밀고 나갈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무계획, 무전략으로 코트에 뛰어들었고 상대팀에게 미안할 정도로 형편없는 플레이를 했다. 선수들이 공유하는 당황스러움과 초조함, 그리고 예측을 뒤엎는 ‘점프줌마’들의 플레이를 응원하는 관중석의 소리, 부당하게 여겨지는 심판의 휘슬로 인해 우리는 형편없는 틈을 기꺼이 열어 내비치고 만 것이다. 농구는 열 명의 플레이어가 만드는 탄탄한 구도 안에서 전략적으로 길을 여닫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지만, 당시의 경기 영상을 보면 우리가 열어놓은 것은 틈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대방은 좋은 플레이를 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쌓아 올렸던 믿음의 영역, 그 거대한 클러스터는 너무나 쉽게 깨져버렸다.

    경기 내내 관중들은 최고의 경기를 본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고, ‘점프줌마’들은 우리에게 팀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갔다. ‘점프줌마’들이 팀 활동을 그만두지 않고 다시 대회에서 마주칠 수 있어서 기쁘지만, 우리팀과의 부딪침이 그들에게 만들어낸 긍정적인 힘에서부터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어차피 그날 우리에게 주어진 게임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당장 집에 가도 됐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실수와 실책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거나, 불쑥 혼잣말을 해서 옆에 있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과를 모른다는 것이 어떻게 스포츠의 윤리가 될 수 있을까? 출전하는 대회마다 똑같은 팀들끼리 출전하고 싸우지만 한두 팀이 모든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독점하고 다른 팀들은 줄곧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시전하고 있음에도 농구 코트 위는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스포츠에서 이러한 사건은 익숙하다. 잘하는 팀이 우승하는 것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뿐이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팀이 좋은 결과를 냈을 때 그것은 ‘진정한’ 스포츠로 조명되며, 오히려 실력 있는 팀이 그렇지 못한 팀에게 단 1점도 내주지 않았을 때 그것은 도의에 어긋난 것처럼 여겨진다.[각주:2]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이 스포츠에 기대하는 것은 불확실성으로 쓰여지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며, 각본 쓰기는 스포츠의 윤리를 지킬 때 비로소 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나은 신체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이 패배한 것은 스포츠를 확실한 것으로 생각한 거들먹거림이었다. 오히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압박감과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정동을 선수들끼리 공유함으로써 결과와 관계없이 매우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하는 것은 잠재력을 발생시키는 정동적 사건이며 이는 말 그대로 코트 위에서 신체적 역량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츠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훈훈하고 뻔한 깨달음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패배와 실패의 경험은 우리팀에게 스포츠의 불확실성을 가르쳐주었고, 어떤 상대를 만나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긍정적인 역량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팀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히려 불어난 불안감, 낮게 흐르는 긴장감. 연습과 훈련은 그것의 정도를 가라앉힐 수 있을 뿐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더 나은 플레이와 순간들을 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나오고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을 견디는 것, 그것을 힘으로 전환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예측하고 반복하는 것. 우리팀이 공유한 것은 농구 코트는 불확실성의 생생한 현장이라는 감각이었다.

  1. 론 버텔슨·앤드루 머피, 「일상의 무한성과 힘의 윤리」, 『정동 이론』, 갈무리, 2015, 265쪽. [본문으로]
  2. 동물들의 물기 게임에서도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기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져주기도 한다. 이는 게임의 지속가능함을 담보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정동적 사회성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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