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네 번째 이야기 / 10월 마지막 주
- 리얼 포레스트: 조이(연재 종료)
- 2018. 10. 30. 09:37
“많이 변했어요. 전에는 굉장히 바쁘게,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오해는 마세요, 나쁘게 변했다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요즘은 열심히 안 산다는 게 아니고... 뭐랄까, 느낌이 변했어요, 여유로워졌달까?”
요즘 들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주위 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도 이 미묘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변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간혹 멀미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서울에 가는데, 언젠가부터 모임 사람들과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난다. 이것이 시골 생활의 큰 장점 중 하나라 생각되는데, 바로 ‘허수의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서울에 짧은 시간 머물다 보니 그 만남이 즐겁고 반가운 사람들 위주로 마주하게 되고 자연스레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그 여유 덕에 지나온 관계들을 되짚어 볼 수도 있었다.
내 삶의 터전이 된 시골집, 이곳에서 겪는 가장 큰 사건은 ‘아빠의 죽음’이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때론 그 소중함도 잊었던 존재, 아빠. 그러한 ‘아빠의 부재’는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이 달 말일로 딱 6개월이 된다.
모든 것에는 좋은 면과 또 그 이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모든 상황에서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학습하고자 애쓰며 살아왔다. ‘아빠의 죽음’으로 이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아빠가 별안간 저 세상 사람이 되는 일을 겪으며 ‘가슴이 뻥 뚫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음은 늘 우리 주위를 도사리고 있지만 회피하고 또 잊고 사는 우리기에 죽음은 우리에게 가까우나 멀다. 그 먼 죽음을 실체로 마주하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또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운명이기에 또다시 죽음을 멀리 보내며 차차 일상으로 복귀했다.
아빠의 죽음을 불행한 사건으로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남겨진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 버거워지니까. 혼자 있을 때는 방 문고리만 보아도 아빠가 느껴져 눈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아빠의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농담도 하곤 했다.
큰일을 겪으며 못마땅해도 가족의 일원이 존재만으로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가족에서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마땅하지 않게 생각되었던 누군가도 또 누군가의 가족일 테니. 애쓰지 않았는데 거저 주어진 큰 깨달음이다. 덕분에 이전처럼 가치 판단을 하며 뭐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안간힘을 내는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대로, 사건이 주어지는 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
사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아빠와 할머니를 못마땅해 했다. 그에 이어 엄마도, 결국 우리 집 자체가 싫었다. 아침식사는 거르고 학교에 가서 점심 급식을 먹고, 저녁은 대충 떡볶이나 친구 집에서 해결했다. 막차를 타고서 집에 왔어도 가족이랑 대화는 거의 안 하고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아빠를 무시하고 컴퓨터만 했다. 엄마는 고생스럽게 야간에 일하시는데 밤낮으로 집에 있는 아빠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내게 할머니와 아빠는 동화에 나오는 자린고비 같았다. 생선을 천장에 걸어 두고 쳐다만 볼 뿐 손대지 않고, 결국 생선 대신 젓가락을 간장에 콕 찍어 혀에 대며 상상하기를 ‘나는 생선 한 입 먹었다. 쳐다만 보아도 배부르다.’하는 사람 말이다. 할머니는 어업과 농업으로 평생 두 손을 사부작대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꽤 큰 논과 밭을 산 대단한 사람이다.
그 대단함에 들볶여 나는 성인보다 버스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유치원 시절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계란 한 판 사서 시내를 오갔고, 집에 와서 저녁으로 후라이를 해 먹으려다 계란을 떨어뜨리면 숟가락을 들고 바닥에 흐물흐물하게 퍼져있는 계란을 그릇에 담아야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극성이었고, 그 극성 덕분에 재산을 모았으나 제대로 써 보시지도 못하고 할머니도, 아빠도 여덟 달 간격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번 달까지 취득세를 납부해야 하는데, 우리는 또다시 할머니와 아빠처럼 재산은 있으나 현금이 없다. 결국 대학원 진학을 위해 모았던 내 적금을 해지하게 되었다. 가정을 위해 큰돈을 꺼낸 게 벌써 두 번째다. 엄마가 4남매에 대한 ‘책임감’에 평생 우리한테 헌신했듯이 나도 가정을 위한 ‘책임감’ 때문에 평생 이렇게 살다가 삶이 끝날까 하는 두려움과 원망이 엄습해 몇 일간 일상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 두 책임감은 참 달랐다. 내 경우와 달리 엄마의 책임감의 전제에는 ‘의미’와 ‘애정’이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그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 행복해하신다. 밤을 새워 고되게 일한 뒤에도 우리를 보면 그 얼굴이 환해지신다. 혁오의 노래처럼 ‘엄마가 늘 베푼 사랑이 어색하다.’ 너무도 큰 저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게 기이하고, 동시에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엄마는 내 주변 누구보다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도 ‘의미’와 ‘애정’이 있는 대상을 찾아야겠다.
요즘 따라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큰 사람인지 새삼스레 다가온다. 애증의 관계였던 할머니와 아빠는 떠났고, 함께하고 있는 엄마는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엄마와 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때마다 떠나간 할머니와 아빠도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조금씩 멀미가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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