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 번째 이야기 / 10월 셋째 주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더위도 아침저녁의 찬 공기에 한 발 물러난 계절이 되었다. 어느덧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농작물이 서리를 맞으면 냉해를 입을 수 있어 그전에 수확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들깨를 털고 고구마를 캐며 꽤 바쁜 한 주를 보냈다.


    유난했던 가뭄과 벌레가 파먹은 덕에 그 수확량은 보잘것없지만 들깨를 베는 노동은 참 행복한 일이다. 특히 들깨의 고소한 내음을 깊이 들어 마시며 그 향기를 음미하는 것은 일 년 중 지금만 가능한 아름다운 경험이다. 들깨는 6월 정도에 파종하여 7월에 모종을 심는 것 말고는 크게 손이 가지 않는 작물이다. 집 근처에 심어두고 깻잎을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하고 들기름, 들깨가루, 깻잎 반찬 등 그 활용도 여러 가지다. 특히 입맛 없을 때는 깻잎을 간장에 조리면 건강한 밥도둑이 된다. 깻잎절임은 양념을 넣고 불에 끓여 조리하는 방법과 양념간장을 따로 끓인 후 깻잎에 부어 만드는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가열한 것이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겠지만 나는 불에 조리한 것보다 그저 간장을 부어 만든 것이 더 좋다. 많이 짜지 않고 깻잎의 아삭한 식감과 특유의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생각보다 노동의 양이 상당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고구마를 캐는 일이었다. 고구마는 아열대 작물이기 때문에 추운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반면 장마가 오기 전에 캐야 하는 감자는 추위에 강하기 때문에 강원도 등지에서도 잘 자란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닿아야 한다(무화과는 예외라서 이름이 무화과). 포도나 사과, 배 등과 같은 과일은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뿌리나 줄기를 먹는 구근 작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꽃과 열매를 연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감자 꽃은 더러 보았는데 고구마 꽃은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드디어 난생처음 고구마 꽃을 보았다! 흰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나팔꽃 모양의 그 꽃을 보고 나니 그 잎도 나팔꽃과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처음은 아니지만 수 년 만에 보는 고구마 꽃을 만난 엄마도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밭일하다 말고 꽤 오랫동안 고구마 꽃을 감상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올해가 유난히 더워 우리나라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고구마 꽃이 많이들 피었다고 한다. 무더운 날씨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힘이 새삼 놀랍다. 



    고구마는 자색고구마, 호박고구마, 물고구마를 섞어 심었다. 비교적 자색고구마가 얕게 뿌리내려서 캐기 쉬웠다. 거의 엄마 아빠, 할머니가 캐 두신 고구마를 먹어왔기에 직접 고구마를 캐는 일은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고구마 캐는 일을 우습게보고 덤볐는데 뒤엉켜 있는 줄기와 씨름하다가 진이 빠져 그 위에 벌러덩 누워 가을 하늘을 감상하며 스스로를 응원하기도 했다. 엄마한테 그 요령을 여쭸더니 먼저 낫으로 줄기를 정리하고 캐면 한결 더 수월하다고 하셨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고구마를 캐다 보면 힘들게 줄기를 베고 깊게 땅을 파낸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크고 예쁜 모양의 고구마를 만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새끼손가락도 안 되는 크기의 녀석이 저 깊이 들어가 있을 때도 있다. 다른 이들이 캐 놓은 고구마를 먹을 때는 그 겉모양이 내 기준에 썩 괜찮아 보이는 것만 골라 먹곤 했는데 이제 고구마를 직접 캐보니 그 수고가 피부로 느껴져서인지 고구마의 모양이 어떠하든지 다 예뻐 보이기만 한다.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열매는 이내 우리들의 입속으로 직행한다. 그렇게 공들여 어여삐 길렀는데 결국 먹어치우기 위함이었다니 굉장히 이중적이라 느껴진다. 인간은 스스로 굉장한 존재인 듯 묘사하나 결국 언제나 외부의 요소들에 기대어야만 그 생명을 존속시킬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마지막 작별 인사도 없이 아빠를 떠나보내니 그간 아빠에게 보냈던 원망과 고마움, 미움과 애정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와 감정과 사고의 그릇이 벅차다. 아빠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아빠는 이제 없다. 아빠가 머물던 계절과 장소에서 아빠가 했던 일들을 하다 보면 아빠의 삶이 조금은 이해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서늘해진 공기를 마주한다.


댓글(2)

  • 행인
    2018.10.23 13:28

    마지막 단락에 와서 저도 제 부친을 떠올리면 왈칵했네요. 조이님께서 느낀 그날의 서늘한 공기가 전해지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조이
      2018.11.15 12:38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서 저 또한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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