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랑해서 하는 걱정

 

    또 실패했다. 엄마와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해놓고 끌려다니고 말았다. 공기 반 소리 반의 ‘네니요’(네와 아니요를 합친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니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점이 가장 답답했다. 앞선 글에서 너무도 많이 다루었던 주제라(5. 현실도피를 위한 공상, 7-9. 아빠친구딸의 결혼식 등) 쓰기 민망함에도 강하게 옥죄는 문제여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엄마가 자신의 끓어오르는 불안, 걱정, 분노 등등을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엄마를 벌집 쑤시듯 들쑤셨을까.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한 친구의 결혼 소식(내가 직접 말했을 리 없다)을 들은 것이 시발점인가 싶었는데 그보다 한 주 앞서 시작됐으니 다른 이유였다. 엄마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자식들 결혼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고 내년에 내 나이가 몇 살인지 헤아려 보다가 퍼뜩했을 수도 있었다. TV만 켜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혼기가 꽉 찬 딸을 걱정할 이유가 즐비하니 말이다. 나는 바짝 마른 낙엽 위의 불씨였다. 화마가 덮쳤다.

    엄마는 도망갈 구멍을 주지 않고 나를 몰아넣었다. ’남자친구가 있습니까? 네. → 내 앞에 데리고 오십시오.’ ‘남자친구가 있습니까? 아니오. → 남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 말해도 이 패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만나는 사람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마시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네 나이가 몇인데. 그러다가 평생 혼자 살면 어떻게 하려고!’ 라고 거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터뜨렸다. 도대체 엄마를 포함한 부모님 세대는 왜 남녀가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야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불안하지 않고, 완전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배경이나 사회안전망의 부재 같은 것을 운운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엄마를 설득하는데 그런 논리적인 이야기들은 하나도 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2019년 30대 초반을 살아내고 있는 나는 이성과의 결혼이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삶이 더 밝고 희망차다는 뜻은 아니다.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살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꼭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결혼하려 애써야 하는지 회의적이라는 뜻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면 되지만 지금 당장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왜 결혼을 강요받아야 한단 말인가. 엄마와 나 둘 중 누구의 생각이 ‘올바른지’ 따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혼으로 잘 사는 사람도,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도 전부 존재하니 말이다.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들어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개인의 삶은 어느 누구의 삶과도 똑같지 않은 것이다. 어느 것도 내가 결혼을 해야만 하는,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에게 결혼을 전제로 한 남성과의 연애를 강요하고 있었고 그에 대항해 나는 왜 그래야만하냐고 발끈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 문제는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불안과 걱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는 애인을 만나며 일상을 보내는데 있어서 하나도 걱정되고 힘든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함께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괴로움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 문제이니 논외로 하면 말이다. 남자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일 나지 않는다고 내가 잘 달래서 안심시켜야 하는 것인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였다. 엄마가 하는 질문에 어떤 방향으로도 답을 할 수 없는데 어떡한단 말인가. 해결 불가능하다고 손을 놓고 있기에는 정서적 공격이 극심했다. 

  “네 친구들은 자기 살길 다 찾아 가는데 너는 뭐니, 평생 엄마랑 아빠가 네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엄마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바라는 건 딱 그것뿐이야. 너만 위해주고 너만 바라봐줄 사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모가 좋은 남자 소개시켜 준다는데 한 번만 만나봐라.”
  “걱정 마세요. 엄마랑 아빠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나 사랑해주는 사람 있어요.”
  “있어? 정말이야? 그럼 엄마가 밥 사줄게 한 번 데려와 봐.”
  “왜 꼭 밥을 먹어야 해요. 내가 알아서 잘 만나고 있어요. 같이 밥 먹은 다음에는 결혼하라고 할 거잖아. 나는 결혼할 생각 없어요.”
  “얘는 누가 결혼하라고 하니, 결혼은 네가 좋아야 하는 거지. 엄마는 강요 안 해. 그냥 어떤 사람 만나는지 궁금하니까 그렇지.”
  “잘 만나고 있어요. 때가 되면 보여줄게.”
  “그 때가 언제인데, 잘 만나고 있다며 엄마도 보여주면 되잖아. 엄마는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 코가 뒤통수에 달려있어도 좋고 키가 코딱지 만해도 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번 주 주말로 약속 잡자.”
  “이 말 녹음해놔야겠다. 내가 좋다는 사람이면 다 괜찮다는 말. 진짜야?” 
  “얘는 엄마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니? 정말이지.”

    엄마는 내가 좋다는 사람이면 정말 다 받아줄까? 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걸고 말하는데 정말인 거 아닐까? 졸지에 엄마의 한계를 시험하게 됐다. 애인과 (언젠가 꼭) 결혼하자고 약속하고 반지까지 나눠 꼈는데 이런 나를 엄마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십대 초반에 사귀었던 내 남성 애인을 엄마가 한번 만나봤던 터라 아마 상상도 못하고 있을 터였다. ‘이성애자가 어떻게 (갑자기) 동성애자가 돼?’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괜찮다고 말했다. 엄마가 말하는 ‘사랑’에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까지 받아들이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는 걸 발견한다면, 말도 안 된다고 화내며 애인을 못 만나게 한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엄마 입장에서 갑작스럽게 딸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여성을 데리고 오면 당연히 놀라고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엄마에게 다른 엉뚱한 남자를 소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내 애인을 소개하고 싶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 엄마에게 내 친구들을 소개할 때가 생각났다. ‘엄마, 학교에서 짝꿍 **이가 오늘 아이스크림 사줘서 맛있게 먹었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성장하면서 엄마를 넘어 또래로 인간관계가 넓어질 때 내 이야기를 듣고 직접 사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내 친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엄마는 그동안 내가 자라면서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 ‘거 봐라 네 친구는 그렇게 상도 타고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뭐니’ 라고 비교를 하는 통에 듣기 싫어서 어느 순간부터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집에서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내 방에서만 지내는 게 편안해졌다. 방에 부모님이 들어오면 얼른 나가라고 핀잔을 주어 내쫓기 일쑤였다.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알지 못하게 됐다. 엄마가 불안해하고 걱정스러워하는 것이 그래서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됐다. 

    성인이 되어 엄마와 조금씩은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애인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년, 이름보다는 특징으로 사람들을 기억하는 엄마에게 애인의 사는 곳을 인식시켰다. 엄마가 비교하며 잔소리하지 않을까 불신의 눈초리였지만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애인이 부모님 드리라고 외국에서 사다 준 선물이며 명절 선물도 전부 애인의 이름으로(** 사는 친구가 엄마 드리라고 사줬어.) 전달했다. 우리의 관계는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그저 ‘** 사는 친구’가 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말이다. 사진도 보여드렸는데 엄마가 시원시원하고 예쁘게 생겼다고 했다. 낯선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라고 데려오면 엄마 입장에서 다른 것들은 눈에 안 들어오고 애인이라는 관계만 인식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관계의 정의 없이 나와 애인이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엄마도 엄마 나름 우리를 무엇이라고 정의하게 되지 않을까. 

    한편 엄마를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사랑을 나누는 관계인데 친구인 척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관계들은 ‘친구’, ‘연인’, ‘부부’라는 이름에서 항상 미끄러지지 않던가. 엄마의 눈에 비친 우리 관계와 내가 생각하는 우리 관계, 애인이 생각하는 우리 관계,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보는 우리 관계는 전부 똑같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중 무엇이 ‘진짜’ 우리의 관계인가. 그 모든 관계들을 ‘동일하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나는 이 다름을 인식하고 인정해서 그로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원했다.   

    문득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엄마가 우리가 연인 관계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눈치채지 못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많이 봐서 익숙할 내 애인에게도 연애 좀 하라고, 둘이 꼭 붙어 다니니 남자가 없지 않냐고 잔소리 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엄마의 근심걱정이 정말 쓸데없고 소모적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예, 아니요’로 빠져나갈 수 없는 엄마의 잔소리 연쇄를 끊어낼 방법은 이것이 아닐까 막연히 기대가 됐다. 너무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외로울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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