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비온 뒤 다지기

    앞선 글 ‘#19 연말의 대전쟁’을 쓰고 처음 보여준 사람은 애인이었다. 당사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쁜 일을 서로에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소외시키는 거라고 강조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전할 말과 못 전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그 글을 읽으면 분명 나와 헤어지겠다고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설사 헤어지겠다고 하지 않더라도 내 부모님이 본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니 속상할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탐탁치 않아한다는 것도 그다지 기분이 안 좋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그렇다면 더욱 마음이 아플 터였다. 그런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하다니 가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파트너와 부모님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못해 양쪽 사이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킨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모양 아닐까. 시어머니도 어이없지만 그걸 그대로 전한 남편도 속 터지기는 마찬가지라고 친구들이 얼마나 욕을 했던가. 글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는 49%의 생각과 보여줘야겠다는 51%의 생각이 싸움을 벌이다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당신과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마음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글을 보내고 잠들었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애인이 답변을 남겼다.

    “우리 친구로 지내요.”
 
    갑자기 만나지 못하고 연락도 못하는 건 너무 힘들 테니 만나기는 하되 ‘친구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남자가 아닌 것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것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 무력감이 든다고 했다. 긴 글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 실낱같은 희망도 빼앗긴 것 같은 애인을 보니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입장을 백 번 천 번 바꿔놓고 보더라도 같은 심정으로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헤어지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화도 내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멍하니 ‘우리 친구로 지내요’라는 말만 반복하는 애인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친구로 지내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이야기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친구로 지내자고요? 나는 그렇게 못해요. 당신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까이 가고 싶고 손잡고 싶고, 키스도, 섹스도 하고 싶은데 다 참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요? 설사 참는다고 해요.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 담겨있을 텐데. 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내가 알 텐데. 이렇게 만나는 사이가 친구예요? 이게 어떻게 친구예요.”

    눈물을 터뜨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 세상이 전부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방해하는 것 같다고 비통해하는 애인에게 우리는 아직, 아무 방해받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물리적으로 격리당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서 떨어뜨려 놓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애인을 달래면서 이상하게 앞으로도 관계를 잘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이 솟았다. 말하고 나니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방해’받은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리적 폭력도 당하지 않았고 제재도 받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이 타격도 유효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엄마와의 대화가 내 생각을 전혀 바꿔놓지 못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애인과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해져서 굳건히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애인을 설득하고 이전보다 더욱 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미안해요. 나랑 만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않아도 됐을 평가인데.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 행복하고 또 가족들과도 단란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랑 관계 맺다보니 엄마의 기준에 의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받은 거잖아요. 내가 없었더라면 당신이 받지 않아도 될 수모인데. 그런 말을 듣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뒤늦게 후회하는 남편들처럼 어리석은 사과를 했다. 애인이 괜찮다고 받아주었다. 기분이 많이 나빴을 텐데 화내지 않고 이야기해줘서 고마웠다. 혼자서 헤어지는 결정을 한 게 아니라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쪽으로 결정해주어서 너무도 고마웠다. 나는 ‘미안해요, 고마워요’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울면서 전화하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마침 둘 다 쉬는 날이었던지라 전화통화 말고 얼른 만나자고 했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려 만난 순간,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창백한 뺨, 너무 많이 울어서 퉁퉁 부은 눈, 화장기 없는 얼굴, 원망과 그리움, 슬픔이 가득 담긴 눈동자, 놓칠 수 없다는 듯 꼭 움켜쥐는 애처로운 손과 따스한 품.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울고 웃었다.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눈물로 웃음으로 나왔다. 아직 나를 만나도 되는지 확신이 잘 안 선다고 하는 애인에게 불에 데여 ‘앗 뜨거’ 했는데 어떻게 바로 회복이 되겠냐고 했다. 다 괜찮으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달라고 말했다. 애인이 현실이 암담하고 어두워서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마음이 저절로 향하고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애인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사인줄 알았는데 진심을 들으니 그저 매료됐다. 태양처럼 찬란히 쏟아지는 사랑에 온통 휩싸였다. 힘들고 괴롭지만 지극히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밝은 것처럼 사랑은 고난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늠이 전혀 안 됐다. 하루빨리 정상가족 울타리에 들어가는 결혼을 해서 가족을 이뤄 살아야겠다는 급한 심정이라면 모를까, 우리 둘 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니 평탄했다. 내가 부모님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뿐이었다. 엄마에게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나에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헤어졌으니 미안하면서도 내가 엇나갈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되도록 연애하는 티를 내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큰 파도를 넘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애인과는 또 다른 일로 크게 싸웠다. 얼마 안 가 엉엉 울면서 화해했지만 말이다. 애인이 우리 둘 다를 알고 있는 친구에게 이 싸운 이야기를 했다. '무지는 그 일로 힘든 게 아닌 거 같던데' 라는 친구의 물음에 애인이 순수하게 전부 까먹고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헤어지니 마니 큰일이었는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상처가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말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부모님 문제처럼 외부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관계를 오히려 더 끈끈하게 하는데 애인과 내가 의견이 달라 싸우는 것은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절감했다.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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