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워 바디>, 이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by 이나

    어려서부터 창작물, 특히 영화를 보고 난 소감 측면에서는 꾸준히 줏대가 없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내 견해보다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 내 감상평은 영 아니더라도 대다수가 재미있었다고 하면 핏빛 혀놀림으로 가득찬 독설은 고이 숨겨서 혼자 트위터나 블로그에나 남기고 지인들과 대화할 때면 ‘저도 그 장면은 좋았어요!’ 하며 호응하곤 하는데, 최근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겨울왕국 2>가 그 경우에 속했다. 전자는 사막 차 추격전 시퀀스와 일렉기타음의 환장의 콜라보 때문에 영화 자체에 집중을 하지 못할 만큼 정신 사나워서, 후자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전편과는 다르게 어쩐지 현자 캐릭터화된 올라프가 생경하고 뭔가 사건이 두서없이 번잡스럽게 많이 배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호평 일색인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몽니부리듯 난 별로였다 하기도 우스운 것 같아 내색하지 않는 것인데, 필연적으로 내게 어떠한 대상을 보는 시각은 좋은 면만 보는 이나1의 의견과 ‘이건 아니지 않나?’ 하며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나2에 의해 두 가지로 존재한다.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한 번은 저자의 모든 주장에 100% 동조하며 읽고, 두 번째는 저자의 모든 의견에 논박한다는 생각으로 읽으라는 독서법을 신봉하는 편인데, 영화도 책과 다름없는 창작물의 일환이라 생각한다(사족: 이 독서법은 신해철에 의해 알게 되었고, 그간 보여주던 언행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도 사교육 광고를 찍고는 이를 합리화하기 전까지 그의 철학과 사상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최근 독립영화계에서 여성 감독들의 눈부신 약진이 있었고, 그 눈부신 결과물로서 <벌새>, <메기>, <우리집> 등과 함께 입소문을 탔던 작품이 <아워 바디>였다. 리뷰 차례가 돌아온 참에 이들 중에서 아쉽게도 상영 시기를 놓친 작품을 골라보기로 했고, 이른바 관상용 몸매를 만들기 위한 종목이라는 편견이 강한 요가나 필라테스 외에 다른 운동을 하는 여성을 별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통념을 꼬집는 것 같아 인상적이라 이 영화를 택했다. 리뷰를 찾아보니 열광적인 추천과 ‘이런 내용인 줄 알았으면 보지 않았다’는 평이 엇갈린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볼까 말까 망설이던 영화의 후기를 검색해보고 그날의 운에 따라 혹평이 더 많이 검색되면 관람을 포기했다가 나중에 후회했던 몇 번의 경험이 떠올라, 이번엔 정말 내가 보고 판단해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이거 남자들이 바라는 여성상 아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욱 하고 올라온 것은 물어뜯기 담당인 이나2였다. 이거 여성영화 맞아? 감독이 여자라던데 명예남성인가?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거야? 홍상수 영화랑 다른 게 뭔데? 이거 '한남들'의 뇌내 망상 중 여성에 대한 욕망의 집대성 아냐? 쉽게 ‘대주고’ 뒤끝없고 미련없는 ‘신여성’ 로망을 이렇게 여성영화로 포장해 놓으면 어쩌자는 거지? 등등 수없이 형언할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영화의 큰 설정은 분명 여성주의적이다. 행정고시에 8년을 쏟은 자영이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면서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과 삶의 주도성을 조깅에 열심인 현주와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되찾게 된다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작은 설정은 문제적인데, 자영은 애착이 없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수동적인데 그가 떠나도 미련이 없어 보인다. 동정이든 우정이든 간에 그녀를 챙겨주는 유일한 친구와도 항상 거리를 둔다. 오랜 세월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며 공부만 해서인지 경제감각이 없다. 생계의 냉혹한 현실과 담쌓고 사는 몽상가로 보이며 가장 심각한 지점은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자격지심으로든 바닥까지 처박힌 자존감에서 기인한 것이든, 자신보다 ‘못한’ 친구의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는 것을 시혜적 태도로 받아들여 성의없게 구는 것은 개인의 성격 부분이니 차치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직에 일정 시간을 투자해 결과치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월급이라는 형태로 받는다는 사회적 약속을 가볍게 여긴다. 현주가 자영에게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던 만큼 크나큰 상심으로 인해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결과라 해도 현주에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현주 대신 나이 많은 직장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풀어내는 것은 특히나 문제적이다. 그 어떤 감정적 교류도 없던 중년 남성에게 현주를 투영한 헤테로적 궁여지책이라는 해석은 지나치게 관대하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완벽주의의 굴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자영이 러닝 동호회의 동생, 직장 상사와 섹스하고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위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성적 주체성을 되찾은 동시에 삶의 주인이 된 거라며 위안 삼으면 끝인 걸까. 두 사람을 대용품 삼아 욕구를 해소하는 성적 방종으로 과연 무엇이 해결되는가, 이건 그간 질리게 봐온 '한남'의 행태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등등의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중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자영이 통상적인 남자보다 나아야 한다고 여기는 걸까. 마음 없는 섹스, 충동적인 일탈 행동, 약속을 어기는 행위 등 모두 어떤 성별은 거리낌없이 행하기에 어쩌면 일상적인 것인데 다른 성별에게는 ‘우리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요’라며 엄격한 도덕과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하고 있었다. 이것도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비교우위를 통해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결벽증에 불과하다는 부지불식간의 깨달음과 함께 내 안의 긍정의 존재인 이나1이 나왔다. 여성은 남성보다 모범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관습적 굴레는 실로 강력했다. 어떠한 판단의 근거로 성차를 들먹이는 무논리성이야말로 '한남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아닌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을 겪어내는 과정, 이 모든 자연스러움을 ‘자영’이라는 여성 캐릭터에 담아낸 것에 대한 거부감은 완벽주의라는 강박에서 기인한 반응인 것이다. 내 안의 유교걸이 창작물에서조차 그 고정관념을 깨뜨린 자영의 일거수일투족을 문제로 여긴 것이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방황하는 일련의 모든 감정과 행위들은 여남과 간성을 떠나 범인류적인 양상인 것이다.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지면 주저앉을 수도 있고 털고 일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여성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이 색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여성이 그간 남성 캐릭터의 전유물이었던 주체성을 지닌 성장서사를 '쟁취'해낸 것이 기쁜 양가감정이 아마 <아워 바디> 후기가 양극단으로 나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나라는 존재의 근간과 성장 환경, 그리고 날 둘러싼 기반은 관습을 선으로, 변화를 악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방심하고 살다 보면 편한 게 마냥 좋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익숙함을 답습하면서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끊임없이 불편함에 직면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복을 기존 체제의 크나큰 위협으로 간주하며 ‘남들처럼 살아라’가 정언명령마냥 작동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에게 허락된 자유와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만난 자영이라는 캐릭터는 내게 익숙함과 거리를 둬야 함의 중요성을 주지시켜 주었다. 더욱 성장하라고, 더욱 건강해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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