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자두 아저씨

   하루는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손님이 등장했다. 풍기는 냄새와 흐느적거리는 몸사위에서 그의 코를 빨갛게 만든 건 이미 물러간 추위가 아닌 알코올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꽤 취해보였음에도 자연스럽게 소주를 한 병 집었다. 이 매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는 손님을 만난 적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이 다행스러운 일이 지금 앞에 서 있는 코 빨간 아저씨로 인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긴장된 마음으로 적당히 거리를 두어 가며 소주를 계산했다.

   계산을 마친 그는 또 자연스럽게 딸깍하고 소주 병을 땄다.

   “저기, 손님… 여기는 편의점이라 실내에서 술을 드실 수 없어요. 저기 밖에 테라스에서는 가능한데…”
   “아가씨, 나도 알아요. 뭐!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봐서?”

   아, 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실내에서 소주병을 따고 그러시나? 사람 헷갈리게! 속으로 대꾸할 뿐이다. 존댓말인 듯 반말을 하는 그의 어투, 사람 헷갈리게 행동한 그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참는다. 그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가 별 소동없이 순순히 테라스로 나섰다는 것이다.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마음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다, 이 정도로 넘어가서. 더 큰 일이 생기지 않아서.

   몇 시간 뒤에 그는 또 찾아와 태연하게 막걸리와 컵라면을 사갔다. 이후에도 시간에 상관없이 빨갛게 달아오른 코와 함께 종종 등장하여 어김없이 술과 라면, 빵 등을 사갔다. 몇 번 매장을 방문하는 동안 첫 날과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하거나 무례하게 구는 일은 없었다. 첫날의 충격이 흐릿해지는 사이, 그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자기는 퇴직한 공무원이며, 연금은 얼마를 받는지, 미혼인 아들이 몇 살이고 어디 사는지, 아내의 직업은 미싱사인데 힘든 일이긴 하나 정년이 없어 좋다느니, 지금은 손목이 아파서 실업급여 받으며 몇 달 쉬고 있다느니, 자기는 심심해서 농사를 짓는데 수확해서 식구들하고 나눠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나 역시 곧잘 그의 말을 응대해주곤 했다. 술 조금만 드시라고 인사치레를 건네기도 하고, 농사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다 그의 말이 끝없이 길어질 때면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삶이 고단하고 피곤한데 저들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 일하는 게 무료해서 대화라도 할 겸 단순하고도 복합적인 이유로 아저씨들에게 곧잘 말을 건네고 친절을 베푼다. 그런데 거의 매번, 열에 아홉 내지는 여덟은 친절과 호의로 돌아오지 않고 선을 넘는 무례함으로 돌아온다! 이 아저씨도 그러하다. 땅 자랑을 하다 말고 내게 그 땅을 줄 수 있다고 말을 하길래,
   “네?! 제가 그걸 왜 받아요, 아저씨 아들 주셔야지.”
   “아가씨가 며느리되면 줄 수도 있지.”
  
   어휴, 왜 친절과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망상에 빠져 저따위의 말을 내뱉는걸까. 저런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알기나 할까, 안다면 저런 말을 못 할테니 분명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했던가. “요즘 시대에 그런 얘기 하시면 안 돼요.”라고 적당히 주의를 주어야 할까? 그런데 내 경험상 이런 말을 내뱉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의는 없었어, 그냥 한 말이야~”라며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분위기를 조장하곤 했다. 차라리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이면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따지고 들 수 있지만 이렇게 악의 없이 무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저 무시할 수 밖에. “그래, 너 평생 그렇게 멍청한 세계에서 살아라.”

   아저씨의 무례한 말에 내딴에는 면박을 준답시고 대꾸했지만 역시 타격감은 제로에 가까웠다. ‘에휴, 이제부터라도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지내야지. 뭘 기대한 건가.’하며 친절을 베풀기보다 내 자신을 지키기에 집중하기로 다짐한 지 몇 주가 지난 이른 아침, 그가 이장님과 함께 등장했다. 이장님은 혼자 지내시고, 그 아저씨도 농사지으러 이 동네에 오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만큼은 혼자 지내신다. 그 둘이 등장해 이것 저것 찾아보더니, 미역국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역국 컵라면, 오뚜기 미역국, 햇반 미역국밥이 있는데 세 개 다 먹어본 바로는 햇반 미역국밥이 가장 나았다고 말씀드렸다. 코 빨간 아저씨는 오늘이 당신의 생일이라 미역국 좀 먹어보려는데 전자레인지로 할 줄 모르니 좀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꽤나 정중히 물었다. 그에게 관심이나 애정이 전혀 없었지만 생일이라는 말에, 사뭇 정중한 말투에 또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린다.

   “원래 이런 거 안 해 드리는데, 생신이라니까 해 드리는 거예요~! 생신 축하드려요.”


    어느덧 무더운 여름날이 되었다. 불쑥 등장한 그 아저씨가 자두를 잔뜩 들고 와 매장 바구니에 쏟아주었다.

   - “벌레 먹은 건 약을 안 쳐서 그런 거예요.”
   - “와, 직접 농사지으신 거예요? 감사해요! 자두가 정말 이쁘다, 사진 찍어야지!”

   그날부터 그는 코 빨간 아저씨가 아닌 자두 아저씨로 기억되고 있다. 자두 아저씨는 지난 여름 이후로 오지 않으신다. 좀 더 저렴한 마트를 발견한 것인지, 농사 짓던 땅을 파신 것인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신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다. 딱히 보고 싶지도 않다. 그저 여태 그러하셨듯이 농사든, 술이든, 가족이든 나름의 즐거움을 가지고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부디 예의를 좀 더 배우시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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