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좌충우돌하는 공공장소 애정표현1
- 어쩌다 퀴어: 무지
- 2020. 2. 7. 19:11
사람이 꽤 붐비는 길거리였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는 남녀 커플이 거의 껴안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딱히 관찰하려는 게 아니고 두 걸음도 안 되는 앞에 있어서 보였을 뿐이었다. 핑크빛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프렌치키스를 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옆에 있는 애인을 바라봤다.
“우리도 뽀뽀해요!”
애인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나는 명실공히 트러블메이커다. 우리 관계가 깊어진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창 흥행했다. 영화를 보러갔는데 사람이 꽉 찬 300석이 넘는 영화관에서 우리의 자리는 중간 복도 끝이었다. 내 옆은 복도였고 애인의 옆에는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여성과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앉아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의자 걸이를 올리고 애인의 품에 안겼다. 볼에 뽀뽀도 하고 손도 만지작거렸다. 영화 불빛이 점멸하며 우리의 얼굴을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하는 동안 애인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쪽에서는 모녀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쪽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잘 보인 모양이었다. 애인이 나를 조심스럽게 말렸으나 그런 사실을 몰랐다. 애인이 살짝 굳어있길래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쓰나보다 가볍게 생각했다.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출구로 빠져나갔다. 우리를 지나쳐 빠져나가는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모녀가 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곤거렸다는 것이다. 영화의 감동에 푹 빠져있던 나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적지향에 대한 이야기를 본 뒤 아니던가.
“영화 보면서 학습했는데 우리가 실전까지 해드렸네요.”
농담을 하고는 웃어재꼈다. 그런 나를 보고 애인이 이마를 짚으며 못 말린다고 따라 웃었다. 옆자리 모녀는 나의 애정표현을 보고 여성인 우리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우리를 가리키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전혀 짐작이 안 갔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자신들 주변에 퀴어가 흔하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니 말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평생을 괴로워하던 문제가 지금 이 영화관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실전’이라고 말했다. 퀴어가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환상의 동물이 아닌 영화를 보러 오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어서 말이다. 매우 유쾌해졌다.
나는 영화관에서뿐만 아니라 집 근처든 번화가든 어디에서나 애인에게 허리에 팔을 두르고 뺨을 쓰다듬는 등 애정표현을 해왔다. 그런 우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기 그지없었다. 대중교통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애인보다 한 칸 아래 서서 폭 안겨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없었다. 주고받는 눈빛이 은근해지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무리 주의를 둘러본다 해도 사각지대는 있는 법이었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서 20대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고개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에스컬레이터가 끝날 때까지 우리를 쳐다봤다. 얼굴은 우리를 향해있는데 몸이 점점 내려가는 모양새였다. 에스컬레이터 속도에 맞춰 고개가 돌아가는 게 어찌나 리얼하던지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그가 받은 충격을 알 수 있었다. 애인과 나는 민망하면서도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마구 웃었다. 이처럼 공공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도 하는 한편 무관심하기도 했다. 이런 신호로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택시는 밀폐된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말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택시기사님이 있으니 공공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나라도 조심스러워졌다. 의자 밑으로 손을 잡고 방긋 웃으며 바라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자기’라고 지칭하고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친구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수가 급격하게 적어졌다. 택시를 타는 순간 애인이 반말을 하면서 나를 이름으로 부르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운했다. 나보다는 택시기사님의 이목을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씨가 달라지니 다른 사람처럼 낯설기도 했다. 살짝 기분이 상해서 거리를 두고 있으면 그런 나를 눈치 채고 손을 꼭 잡아왔다. 장난으로 손을 뿌리치면 따라와서 손을 잡고 또 뿌리치고 손을 잡고, 손장난을 했다.
한 번은 둘 다 기분이 좋고 활기찬 상태일 때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피자가 맛있다, 치킨이 더 맛있다’와 같이 아주 사소하고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투닥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택시 기사님이 점잖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시네요. 하지만 싸우지 맙시다.” 우리는 웃으며, “거 봐요, 기사님이 싸우지 말라고 하시잖아요. 당신이 우기지 않으면 되는데.” “아니죠, 기사님은 당신 보고 조용히 하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 싸우지 맙시다.” 맞장구를 치듯 싸우지 말자고 또 싸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려는 우리에게 기사님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세요’ 라고 인사해주셨다. 감사하다고 응답하며 호텔 앞에 내린 우리는 아마도 기사님이 우리 관계를 아셨을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원하는 대로 해석한 것이겠지만 예쁘게 사랑하라고 응원하는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 그대로를 좋게 봐주니 관계를 인정받은 것 같았다. 관계를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한다는 조마조마함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애인과 자주 가는 단골 식당에서 겪은 일도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 가면 서로 수저를 챙기고 음식을 떠주느라 부산스러운데 그 날도 그랬다. 공공장소에서는 내 애정표현을 잘 받아주지 않는 애인이지만 경계가 풀렸던지 음식을 먹는 도중도중 손을 잡기도 하고 테이블 아래로 발장난을 하기도 했다. 데이트의 일종이었던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얼굴을 익힌 직원분이 말을 걸었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 정말 맛있었어요.”
“두 분 자주 오시더라고요. 사이가 정말 좋아 보여요. 좋은 사람이랑 같이 먹으니 더 맛있나 봐요.”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깜짝 놀랐다. 식당을 빠져나와 눈치 챈 것 아니냐 토론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친구 정도로 생각하실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직원분이 어떻게 생각했든 각별하게 보인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규정지어진 관계의 이름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칭찬으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행동은 그 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 단골 식당 하나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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