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나는 가지지 못한다. (1)
- 온전히 생존기: 김경진
- 2020. 2. 10. 17:01
몸의 난조로 몇 주를 앓았다. 지금은 회복 중이다. 근래의 몇 주 중 오늘이 가장 선명하다. 이 정도라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또 쓰기를 시작한다. 일주일은 속탈이 나서 위염과 장염을 동시에 앓았고, 달팽이 같은 속도로 몸을 회복하던 차에 어디에선가 독감을 얻어 또 2주 남짓을 앓았다. 침대에 돌멩이처럼 고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온종일 누워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소리가 너무 크구나, 떨어지지 않는 열에 휩싸인 채로. 눈꺼풀이 뜨겁게 떨리는구나, 하다가, 간신히 일어나서는 과일이나 시리얼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챙기고, 약을 삼키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감으러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억지로 눈을 뜨면 세상이 눈 안쪽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독감약의 부작용이었다.
몸이 한껏 앓으니 덩달아 마음도 약해졌다. 심신이 한껏 약해져서도 마음껏 풀어 헤쳐지지 못하고 자꾸만 괜찮다고 되뇌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위처럼 단단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괜찮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무서웠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괜찮지 않아지는 것이 무서웠다. 약해도 괜찮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고, 그래도 잘 기능하며 살 수 있으니까 괜찮고, 그래도 이만큼 움직일 수 있으니까 괜찮고, 지금은 정말로 괜찮고, 어쨌든 괜찮다고 말해야만 안심이 되는 이유를 나는 사실 알고 있다. 나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자꾸 아프고 넘어져서는 도저히 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돌아갈 자리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실감, 멈춰 있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관성으로, 자꾸만 무언가를 치열하게 하는 삶으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린다. 제 살을 연료 삼아 깎아 먹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삶의 복판으로. 제발 멈추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하고 싶은데 빌 곳이 없다. 멈추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보면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런 말들을 자꾸 들으면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고 착각해버린다.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게 되어버린다. 잘 걸어가는 사람은 멋져 보인다. 실은 나도 웬만하면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 멈출 자리가 되어주는 것 보다는 멋지다고 말하는 게 쉬워서 나에게 멋지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알고 있다고 해서 겪지 않게 되는 일도, 겪지 않아도 되는 마음도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경향이 있어 스스로를 무심코 벼랑까지 몰아붙여 떨어뜨리곤 했는데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그 이유도 이미 알고 있다. 연결을 잃거나, 뜻대로 이어지지 않았던 경험들, 그 안에서 나의 원함을 빼놓고 포기했던 경험들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때가 언젠가 오겠지.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냥 가만히 겪어내며 놓아둘 수밖에 없다. 무언가 하려 할수록 더 벌어져 피가 쏟아지는 부분이라는 것도 이미 알기 때문에, 가장 약하고 따끔거리는 부분을 드러내 놓은 채 그저 보고 있기만 하는 일.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아는 일. 아주 많이 괴로운 일이다. 나는 또 습관처럼 괜찮다고 쓰려다가 문장을 바꾼다. 무언가를 자꾸 쏟고 놓으며 사는 것이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익숙해지거나, 지나갈 것이다.
나는 포기하고 홀로 견디는 데에 익숙하다.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보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다. 가지지 않고 놓아두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도가 텄다. 삶 전반에 걸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자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남에게 뭘 달라고 떼를 쓰거나, 뭘 원한다고 말하거나, 질투하거나, 집착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사실 질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게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묻는다. 너는 질투가 뭐야? 그건 가지고 싶어하는 감정이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거랑 비슷해. 알고 싶어? 그걸 아는 게 꼭 너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어. 질투는 많은 것을 명확하게 하고, 많은 것을 흐리게 해. 꽤 여러 사람이 대답을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것들을 지나 보내기 위해 나는 쓸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싶었으나 놓아버렸던 것,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있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자리, 나를 약하게 만들고 소진시키고 비우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서. 엄마와, 가족들, 연인들과, 친구들, 그들과의 관계, 가지지 않은 자리, 아니, 가질 수 없었던 자리, 그들이 만들어 둔 울타리 안쪽의 사람으로 자라, 마침내는 가지고 싶었던 나의 모습들에 대해서. 읽는 누구도 온전히 읽어내지 못하는 글이 된다고 해도 나의 약함에 대해서 나는 쓸 수밖에 없다. 나만이 응시하려 하는 나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
최초로 기억하고 있는 포기의 경험은 과자 한 봉지에 대한 것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꿀 꽈배기 과자였다. 그, 당시의 내 몸통보다 조금 작을 만큼 큰 탓에 양팔로 꼭 끌어안고 있어도 품에서 조금씩 미끄러지던 과자 한 봉지가 어떤 경위를 거쳐 내 손에 쥐어졌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생이 내가 끌어안은 과자 봉지를 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울음을 터트릴 때의 당혹감은 기억한다. 놀라며 달려온 엄마가 허둥지둥 동생을 일으키며 울음의 이유를 묻자, 동생이 그 작고 짧았던 손가락을 들어서 내 품속의 과자 봉지를 가리켰을 때 느꼈던 무서움도 기억한다. 얼굴이 삽시간에 확 달아올랐을 때, 훅 끼쳐오던 불편한 열감을 기억한다. 죄를 지었다가 들킨 기분과 비슷했다. 과자를 가진 것이 어린 애의 죄가 아닐 텐데, 어린 동생의 손가락이 품속의 과자 봉지를 가리키자 과자를 가진 것이 부끄러워졌다. 얼른 과자를 바닥에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내 품에서 과자를 빼앗아 동생의 품에 안겨준 다음에야 울음이 그쳤다. 동생은 울음을 그치고 비척거리며 일어나서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운하고 약이 올랐지만, 동생이 한 것과 똑같이 울며 조를 수는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그런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보살펴야만 했다. 동생에게 무언가를 양보할 때 서운해서는 안되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나는 일곱 살,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우리는 둘 다 어렸지만 어쨌든 그것이 엄마가 나에게 준 역할이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에게 엄마는 나중에 똑같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과자 한 봉지가 온전히 내 품으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과자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나를 혼냈다. 동생에게 양보한 것이 그리 아깝냐고, 그깟 과자 안 먹으면 그만 아니냐고, 너는 속이 없다고 했다.
그날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 비슷한 찝찝함과 서운함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느라 그랬다. 동생을 품에 안고 돌아누운 채 잠든 엄마의 등을 보면서. 종국에는 그 기분들을 어찌어찌 털어버리기는 했다. 나날을 지내며 종종 그때 느꼈던 부당한 감정들이 불쑥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곤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이후로도 서운해하지 않고 양보해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 최초의 과자 한 봉지가 좋은 의복이 되고, 좋은 의복이 새 책상이 되고, 새 책상이 방이 되고, 방이 등록금이 되어서야 알았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보다 애교와 응석이 많은 동생을 더 사랑했다. 엄마 없이는 어디 나가지도 않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엄마를 필요로 하는 모습을 사랑했다.
얘는 정말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내가 꼭 옆에 있어야 해. 그렇게 말할 때의 엄마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눈꼬리에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무언가 뿌듯해 보였다. 돈 문제만 아니라면 나는 대부분 혼자서 했다. 혼자서 책가방도 챙기고, 어떤 학교에 가야 하는지 알아보고, 스스로 밥을 챙겨 먹었다. 쟤는 사랑받게끔 행동할 줄을 알아. 너는 가족이 필요 없어, 너는 네 밥그릇만 챙길 줄 알아. 예쁨도 미움도 다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거야. 실은 나도 엄마에게 좀 더 떼를 쓰고 사랑도 받고 싶었다.
표면적으로 내가 포기한 것은 물질이지만, 그 포기한 물질들은 그저 물질이 아니었다. 그 물질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욕구라고 치면, 나는 욕구를 내려놓는 방법을 반복해서 학습하며 자란 셈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포기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 소속에 대한 욕구, 관계에 대한 욕구였다. 내가 포기한 것은 사랑을 주고받는 삶이었다. 무언가 필요하고, 애정이 그립고, 외롭더라도 그것들이 충족되기를 계속 원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포기하고 모두에게서 분리되는 것으로, 나는 나를 지켰다. 그렇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나자, 나는 가지고 싶은 마음을 참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있었다. 무엇이든 주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도 섣불리 달라고 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괜찮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 말을 너는 내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 로 듣고는 너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실은 그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계 맺음에 있어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은 중요하다. 관계를 지속할 때 주고픈 욕구와 받고픈 욕구가 비등하게 작용하는 관계가 좋은 관계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물질을 바라지 않아도 소속감이나 어떤 감정작용을 충족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물을 준비하고, 마음을 소비하고, 시간을 쓰고, 앞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대화를 나눈다. 소속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며, 욕구에 대한 값으로 본인이 가진 선물, 마음, 시간, 집중력 등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걸 말로 해야 할 만큼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잘 없고, 사람들이 욕구를 충족하는 관계의 본질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낯설게 들리기도 한다. 어쨌든, 받고픈 욕구가 없어 보이고 끝없이 뭔가를 내려놓는 사람은 감정이 좀 결여되어 보이고 마주 앉아 있으면 소외감을 느끼게도 할 것이다.
떠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구가 나에게로 향할 때면 나 또한 욕구의 대상이 되었을 때 느껴지는 일종의 충족감이나, 관계에 소속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안정감을 느꼈으니까. 내가 그들에게 같은 것을 주지 못하게 하는 사람인 점에 대해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사람들이 왜 ‘원하지 못함’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지 원망스럽기도 하다. 나는 관계 맺음의 주류적 방식 안에 들어가기가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외로움이 커진다. 왜 이런 사람으로 자랐나 자책감이 들고, 그간 살아낸 모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혼자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다. 그저 관계들을 되짚고,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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