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나는 가지지 못한다 (3)

   이런 시도들은 사랑에 대한 형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개인 단위의 운동인 동시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응시하고자 하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가고자 하는 서사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을 동반하지만, 이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행동 저변의 못난 이유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포용할 수 없는 많은 룰들이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해야 하는 독점 연애의 룰, 자식이 이유 불문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정상 가족의 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많은 대상화-침해의 룰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룰의 바깥으로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규칙들이 필요했다.

    실은, 나에게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는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이루어내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게 내 삶이 모든 방향으로 지향하는 목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자주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기존의 관계 지음들이 가지고 있는 룰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도피처를 찾는 것인지, 자발적으로 더 많은 형태의 사랑을 만나기 위해 룰을 깨고 싶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전자가 좀 더 크다면 왠지 패배자가 된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할 것 같았다. 곧 결론을 내리기는 했다. 이건 패배하고 승리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맞지 않는 옷을 헌옷수거함에 버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나는 기존의 관계지음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을 바란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그리워하는 가족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주어진-강요된 기존의-혈연관계의 가족이 아니라, 아직 가지거나 만들어보지 못한 형태를 한 관계지음에 기반한 가족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정서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합한지조차 잘 모르게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가족이라는 말과 그 안에 내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관계의 형질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정이 아득한 향수와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관계지음이나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자주 가족이 그립다는 말로 태연하게 외로움을 노출해왔다.

    많은 계기와 지난한 과정들을 겪어내며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그리움이나 가족을 만들고픈 마음도 흔적만 남은 채로 잘려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리고 이러한 그리움을 상실하는 과정이 정말로 신체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며 몸을 앓게 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그리움이 흔적만 남기고 없어져 버리고 난 지금에 와서야 그 사랑이라는 이름에 동반되는 침해의 규칙들에서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것들이 나를 정도 이상으로 괴롭히지 못하며, 그것들에서 이전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관계에 대한 일말의, 일말의 것까지 내려놓은 뒤에야 이해타산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방에 앉아 거울을 통해 나를 보면서, 그리고 만나지는 사람들의 눈을 보고 그 눈 안쪽에서 반짝거리던 마음들을 떠올리면서, 사랑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다. 형태나 본질을 모르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은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앞에 적었듯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고민은 곧 살아냄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내야-지속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촉발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을 응시해내기 위한 공상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물의 장면을 떠올린다. 발 딛고 있는 땅 안쪽에 물길이 있을 거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존재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고 조용히 흐르는 물의 길을 떠올린다. 누군가 알아줄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 물이 땅 밑에 엎드려 기어가듯 흐르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우연히 기여되기 위해서이다. 물길을 트다가 나무뿌리를 만나면 나무뿌리를 적시고, 어쩌다 땅 위로 드러나게 되면 그 땅 위에 마침 서 있던 자들의 목을 축이기 위해서 물은 흐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물이 사랑이구나. 그리고 실은, 사랑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사랑과 내가 분리되어 있어서 사랑-의지만 남거나 나-행동 주체만 남으면, 사랑은 행위가 될 수 없으니까. 이러한 방식에는 대상이 없다. 그러니까, 그 물을 누가 마시게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이 흐르는 자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물을 마시면 된다. 물을 마실 권리는 모두에게 있으니까.

    형체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조금 현학적이고 모호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글로 풀어서 적은 것보다 더 명확한 이미지였고, 내 삶의 태도에 있어 토대를 만든 실감이었다. 사랑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줄 수 있는 것이 생긴다면 주는 것이었다. 언제나 손을 비워 두고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 기다리는 마음 안에 사랑이 있었다. 손을 비우는 행위가 중요해지자 내 손 안에 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손안에 쥔 것이 별로 없기도 했다. 나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것이 항상 한정되어 있었다. 영상, 글, 사진 같은 스킬적인 도움이나 마음,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 말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나는 손안에 쥔 빈곤한 것들로 감사히 사람들을 만났다.

    때로는 갑자기 사랑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찾기도 했다. 자주 쓰던 말 중 하나는 편이 되자는 말이었다. 단기간에 말로만 하는 소통은 언제나 한계와 정도가 있다.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로도 사랑을 다 전달할 수 없음을, 편이 되자는 말 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가볍게 비껴가는 경우도 자주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고, 같은 편이 되자고 말하고, 그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말들로 마음을 다 전달하고 실천을 완수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사랑하는 행위는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마 계속해서 노력하고 이야기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특정 관계들-앞서서 계속 얘기했던 연애나 가족관계 같은-바깥으로 끌어내어 단독의 형태로 인지하고 행동하기 시작하자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 관계의 폭이 크게 넓어졌다. 가족, 연인,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 같은 말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관계성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개랑 어떤 관계야? 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나는 아무개는 그냥 아무개야, 이건 그냥 아무개와 나의 관계야,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보편적 관계성 안에서 부여되는 역할들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니까 비로소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대상화되고 맥락화된 모습들을 치워 내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고유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그 고유성이, 그 다름이 감사했다. 그 만져질 듯한 고유성 덕분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사소하지 않고,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와 글자가 아니라 눈과 손으로 알 수 있었다. 자꾸만 주변부가 확장되는 감각이 있었고, 그 감각들이 즐겁고 감사했다.

    그들에게 내가 본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들은 나에게 마음을 열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좋은 딸이 되고 싶어서, 좋은 연인이 되고 싶어서,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들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숨죽이고 눈치 보며 열심히 일때는 생기지 않던 자리들이었는데 자리를 가지고 싶은 마음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주는 만큼 받고 싶은 마음도 내려놓은 뒤에야 이런 일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묘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내가 나의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기만 해도 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관계의 보편성에서 탈출해서야 간신히 알게 되었다. 감사한 깨달음이었다.

    주변부의 사람들은 내가 건네는 것을 조심스럽게 받아갔고, 내 손이 빌 틈도 없이 빼곡하게 많은 것들을 채워주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고, 아픈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거나 책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보다 더 실질적인 도움들도 많이 받았다. 어느새 나는 몇 몇 사람들이 무언가 나누고 싶을 때 떠올려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받는 게 빚을 지는 것 같아 죄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죄스러움도 곧 털어냈다. 빚을 지면 갚고, 갚은 다음에 또 빚을 지고, 그렇게 관계를 이어나가며 살아가면 되었다. 서로 빚지고 빚 갚는데 열심인 관계에는 단차가 없었다. 동등하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기존의 룰에서 탈출한 관계의 방식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매번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마음을 식히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변함이 없었다. 나에게 연애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관계 방식을 듣고는 손사래 치며 떠나갔고, 그것은 언제나 아픈 일이었다. 멜랑콜리아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가족들과 함께 멸망의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을 스크린 너머에서 구경하며, 내 주변의 사람들은 멸망의 순간에 가족과 함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면 나는 함께 있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외로운 일이지만, 나는 그럴 일을 대비해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으니까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고비를 넘어갈 수 있었다. 어쨌건, 운석 때문에 세상이 멸망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보다 큰일은 관계의 주변부가 넓어질 때마다 함께 감내해야 할 아픔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4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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