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나는 가지지 못한다 (2)
- 온전히 생존기: 김경진
- 2020. 4. 13. 09:44
가지지 못한다. 가지지 못함, 소유 개념이 부재하는 관계 맺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연애 이야기만큼 적당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연애야말로 소유욕이라는 것이 가장 철저하게 투영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소속되는 것과 소유되는 것은 분명 다른데, 연애 관계에서만큼은 이것이 자주 혼동되거나 혼용되는 것 같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니까 말이다. 넌 내 것, 난 네 것, 대부분 그러면서 연애를 하니까 말이다. 나의 첫 연애는 열일곱 살 때였는데, 나는 그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하는 애였다. 그때는 폴리아모리 같은 개념조차 몰랐는데도 그랬다. 폴리아모리(흔히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 번역한다. 나는 ‘다자연애’보다 ‘비독점적’이라는 텍스트를 더 강하게 읽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개념은 좀 더 자라서,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았다. 물론 연인 듣기 좋으라고 장난삼아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 장난을 빙자한 거짓말이니까.
무엇보다 관계를 소유로 정의하는 그런 말들은 개념적이나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생리적인 것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조금 과장하면 뭔가 역겨운 걸 봤을 때처럼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마음에 자물쇠가 걸렸다. 혹은, 나쁜 일을 저지르기 직전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지금보다 훨씬 더 솔직한 성격이었던 데다가 불쾌감에 면역이 덜했던 과거의 나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예외 없이, 삽시간에 인상을 쓰거나 정색을 하며 달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는 했다. 나는 네 것이 될 생각이 없어. 그리고 나도 별로 너를 가지고 싶지 않아.
가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순식간에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앗아갔다. 당시에 파트너였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무안해하거나,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거나, 화를 내곤 했다. 그 말에 동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인 것처럼, 연애는 으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때는 그들이 그토록 당연하다는 듯이 화를 낼 수 있는 이유가 소위 말하는 ‘독점 연애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공고히 작동하고 있어서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서 넌 내 거, 라는 말을 왜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독점 연애는 그냥 당연한 거였고, 그들의 눈에는 그 당연함에 동조하지 않는 내가 낯설고 이상하고 야속했을 것이다. 내가 소속과 소유의 개념이 혼동되는 관계 양상에 이질감을 느끼듯이 그들은 소유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을 상상하거나 실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애초에 물건도 아니고, 의지를 가진 타인과의 관계에 ‘소유’라는 개념을 부여하는 것이 좀 폭력적이지 않나? 이런 질문은 그놈의 사랑 앞에 가져다 대기에는 너무 뻣뻣하고 원론적인 질문이었던 것이다.
소유욕이 기반에 놓인 사랑들 때문에 나는 꽤 상처를 많이 받았다. 사랑하는 그들 옆에 있으려면 나는 원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비단 연애뿐만 아니라 애정을 동반하는 다른 관계 양상들 안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받을 대상이 정해져 있는 사랑은 대상화적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내가 ‘너의 무언가’가 되어주길 바랐다. 별 도움 없이도 잘 커서 물심양면으로 끝없이 양보하고 효도하는 딸이 되어주길 바라거나, 본인에게만 감정이 작동하고 본인에게만 사려 깊은 연인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들이 나를 몇 가지의 모습으로만 대상화한다는 것도, 본인이 타인을 일방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도,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관계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향되지 않을 것도, 나는 알았다. 그래도 그들의 옆에 있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사랑했으니까.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그들이 나의 방식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상처받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나의 면면 중 몇 개가 없는 셈 되는 것이 더 감내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연인의 자리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계속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연애를 하고 싶어 할 때만 연애를 해도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내가 취하게 되는 방식은, 서로가 각자 발을 붙이고 있는 몰이해의 영역에서 출발해 함께 이해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지는 못했다. 그런 이상적인 관계 방식을 꿈꾸면서도 현실의 관계 유지는 언제나 저울 위에서 이루어지는 포기와 거리 두기였다. 포기는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거리 두기는 관계 안에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다. 언제나, 매번, 예외 없이, 나나 파트너들 중 누군가가 더 많이 포기하고 참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관계 안에 들어갈 때마다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슬픔을 느끼고, 그들이 원하는 모양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자기 파괴를 감행하며 또 슬픔을 느꼈다.
그렇게 노력해도 끝내는 해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그 해내지 못한 부분을 알지 못해서 상대방에게 괜한 상처를 입혔다. 내 옆이 아니라면 입지 않아도 될 종류의 상처를 말이다. 끝끝내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항상 ‘넌 내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을 수는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고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내 손에 움켜쥐고 싶지 않았다. 관계가 마감되거나 변형되어도 삶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그들이 지속 가능한 본인의 삶을 본인의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옆자리 어디쯤에서 계속 그들을 들여다보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어떤 모습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랑을 무기로 삼아서 누군가의 본질을 헤쳐놓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바래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격지심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존중하고 기다리는 것을 한결같이 해냄으로써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그냥 놓아두었다. 이미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우리가 만드는 관계가 이런 모양이 아니게 되더라도, 혹은 사랑이 아니게 되더라도 너의 옆에 있을 거라고. 너는 나에게 소유되지 않았고, 너는 언제나 자유롭다고. 나 외의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네가 나 외에도 많은 것과 사랑을 주고받고, 너의 모습 그대로 존중되기를 바란다고. 여기에 적힌 말들은 진심보다 더한 진심이다.
나의 파트너에게 나 외에 다른 파트너가 생겼을 때, 나는 그 다른 파트너를 몇 번 만나고 나면 그도 사랑해버리곤 했다. 내 옆을 자발적으로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다른 존재가 있다니 감사하고 사랑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의 생김과 태도를 하나하나 톺아보면 그 또한, 선행된 이유-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가 없더라도 너무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분모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버거운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관계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은 복수의 사랑, 가지지 않으려는 사랑을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했다. 파트너들은 대부분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사랑을 의심하며 불안해했다. 그들이 불안이나 질투 때문에 앓는 모습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왜 보편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이끌어갈 수 없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 자책하고 자책하며, 그들이 나에게서 정을 떼고 마음을 식히고 태도를 바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받을 때, 스스로가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주변인 중 몇몇은 누군가에게 ‘넌 내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질투에 기인한다고 보일 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 나를 지켜보다가 못 견뎌 한마디씩 하곤 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거나, 네가 상대방보다 덜 사랑하고 있다고. 많이 사랑한다면 그럴 수가 없다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열렬하게 모두를 사랑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었는데, 그걸 온전한 모양으로 받거나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아직껏 없는 것일 뿐이다. 왜 그렇게 해주지 못하냐고 떼를 쓸 수는 없다. 그것은 상대방의 본질을 해치거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다. 아주 슬프긴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여겨진다.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든 매번 같은 것을 함께 바라지 못하고, 그러한 이해관계를 통찰해내지 못해 많은 것에서 눈 돌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이해관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갈 수 있는 부분의 일이면 좋겠는데 사랑을 수용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이만큼의 차이가 나는 것은 물과 불이 다른 것처럼 극명하고 본질적인 차이였다. 서로의 방식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고 느낀 적도 때때로 있었지만, 이해와 수용은 언제나 실패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쯤은, 아니 생각보다 많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적도 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사랑을 하는 중인 여자’라는 역할의 수행을 요구받는 것도, ‘넌 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같은 말을 돌려주지 못해서 겪게 되는 갈등들도,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 양상 속에서 나를 자책하게 되는 것도 두려웠다.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을 스스로에게도 들키지 않을 몇 가지의 방법을 은밀히 생각했다. 하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주변에 있지 않지만 같은 키워드 몇몇 개를 나눠 가지는 비슷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낸 두 가지 방법 중에 후자를 선택해 보기로 했다.
(3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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