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리아, Misunderstood> by 정수
- 글 다락: 사고(思考)뭉치
- 2020. 5. 12. 19:21
아리아가 원한 건 약간의 이해와 순수하고 달콤한 사랑, 그리고 약간의 겸손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허세와 외로움으로 가득한 힙스터 영화
제멋대로인 유명인 부모의 크고 작은 학대와 무관심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아홉 살 소녀 아리아. <아리아>는 프랑스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이탈리아인 자녀들이라는 설정부터 복잡한 영화다. 감독의 뒤죽박죽한 취향과 혼란스러운 연출 때문에 영화를 차분히 감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묘한 조화로움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런 와중에 아리아 역할을 맡은 배우의 담담한 연기는 아리아의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영화의 원제는 Misunderstood, 즉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하는, 오해를 받는’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아리아와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상황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엄마는 작은 언니를, 아빠는 큰언니를 편애하는 집안에서 홀로 사랑을 갈구하는 아리아의 행동은 늘 구제불능 취급을 받는다. 부모의 이혼 후 엄마의 집과 아빠의 집을 쫒겨다니다시피 왔다 갔다 하며 사는 아리아는 자신이 가장 우아한 눈물을 흘리는 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리아가 의지할 상대는 검정고양이 ‘닥’뿐이다. 영화 오프닝부터 아리아는 ‘닥’이라는 이름을 정해 놓고 고양이를 기르기를 원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기르지 못한다. 나중에 집에서 쫒겨났을 때 만난 검은 고양이를 닥이라고 부르며 억지로 납치하듯 길에서 데려온다. 케이지에 갇혀 억지로 아리아에게 안기는 닥의 불편한 울음소리가 두 존재의 잘못된 관계를 알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온전히 9살 소녀 아리아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는 ‘어른’이라고 생각될 만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고 언제나 자신의 기분만을 우선시한다. 자신의 커리어만 신경쓰고 미신에 빠져 사는 아빠, 애인을 바꿔가며 놀러 다니기 바쁜 엄마. 아리아는 그런 부모의 행동이 서운하지만 그럼에도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며 “이 정도 학대는 견뎌야지”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지금 여기, 한국에도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이 곳곳에 산재한다. 부모의 학대에도 아이들은 바로 그 부모에게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어 한다. 또 가정 내에서 자신들이 철저하게 힘없고 약한 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대한 통념과 환상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학대들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엄마가 밥을 먹지 않는 아리아를 때려서 아리아의 입술이 찢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 엄마는 또 아빠에게 맞아서 머리를 다친다. 엄마는 다친 곳을 살피며 “니 아빠는 괴물이야”라고 말하고, 아리아는 자신의 찢어진 입술을 만진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동안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입힌 상처는 망각되는 것일까.
만약 아리아의 부모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나는 그들을 욕하기보다는 그냥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건 큰 희생과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다. 아리아의 부모는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에는 욕망이 넘친다. 아리아의 부모가 아리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왜 아이들을 낳은 걸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도 어릴 적 싸움이 끊이지 않는 가정환경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하기를 바랐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언제나 죄책감에 시달렸다. 속으로 나를 왜 낳았을까 원망도 많이 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절대 아이에게 날 왜 낳았냐고 원망받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여야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이기적이라고 비정상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는 온전한 일상을 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결여돼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슬아슬해 보이는 아리아의 모습을 다소 경쾌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친구와 인형 놀이하는 장면조차 마음 편히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리아의 학교생활 역시 고단하다. 같은 반 아이들은 아리아를 시기하고 따돌리지만, 아리아도 마냥 착하지만은 않다. 허세 가득하고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아리아는 담배를 피워대며 잦은 말썽을 일으킨다. 아리아의 학교 선생님 역시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신경질적인 선생님이다. 덩치가 큰 학생에게 ‘뚱땡이’라고 부르고, 그 아이가 실수하자 더 심한 별명으로 그 아이를 부르도록 반 아이들에게 시킨다. 나도 선생님에게 놀림받고 반에서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있다. 선생님을 제2의 부모님이라며 우러러봤지만, 결국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학창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건 천운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일까?
외로운 아리아에게도 단짝 안젤리카가 있었다. 서로 같은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친구. 너무 좋아서 계속 뽀뽀하고 싶은 친구. 둘의 사이는 보기 좋지만 아리아가 안젤리카를 좋아하고 의지하는 모습이 조금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을 부렸던 내 예전 감정이 떠올라 그리웠지만, 그 끝은 그닥 좋지 않았다. 영화 속 아리아 역시 결국 안젤리카와 멀어진다. 친구는 삶에서 중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핍으로 점철된 시기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여학생이라면 대부분 경험했을 법한 남학생들의 성희롱 장면도 나온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 가슴 사이즈를 추측하고 평가하며 놀려댄다. 그런 남자아이들을 욕하면서도 아리아는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가슴에 신경을 쓰고 친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아리아의 첫사랑은 짓밟힌 채로 끝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첫사랑이었을까. 내 생각에 아리아의 첫사랑은 안젤리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아리아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다가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다소 충격적인 행동을 한다. 응급실로 향하는 아리아와, 서로 의지하며 걱정스러워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나고, 엔딩에 이르러 아리아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피해자인 척하려고, 그래서 날 이해해 달라고 전부를 이야기하지 았않다.
'이젠 전보단 좀 더 날 다정하게 대해 주겠지...'
반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마지막 대사는 영화를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게끔 만들어주고, 서로 삐걱거려 아귀가 맞지 않는 듯했던 영화의 장면들을 완성시켜준다. 이 대사가 왜 영화를 열고 닫는 문이 되는지, 많은 이들이 직접 영화를 마주하며 감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리아>는 호불호가 갈리고, 누구에게든 쉽사리 공감되지는 않는 영화일 수 있지만, 내게는 꽤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혼돈의 사춘기 시절, 높은 자의식만을 방패삼아 보낸 내 사춘기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illust: cellophane
http://sagomungchi.creatorli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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