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애 던지기(throwing a girl)*

* 계집애 던지기(throwing a girl)는 Iris Marion Young의 「Throwing like a girl」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0)에서 ‘like’ 빼고 베껴왔다.


   공을 던지는 최초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 몸만 한 탱탱볼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어른들의 박수를 받는 유아 때의 사건 말고, 그러니까 내가 소녀였을 때 유효타를 날렸던 최초의 공놀이를 떠올려본다.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은 언제나 졸렸지만 체육 시간에는 오히려 에너지 넘쳤다. 체육부장이었던 내가 준비 운동 동작과 함께 하나 둘 셋 넷 선창하면 반 애들이 둘둘 셋 넷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손목, 발목부터 허리와 골반을 골고루 비틀고 나면 관절이 열리고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몸이 된다.

    당시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피구공에 스핀을 넣어서 한 큐에 두 명을 아웃시키는 기술을 종종 구사했는데 이 기술의 시작은 위협적인 제스처, “(무심하게) 한 번 던져볼까”로 수비의 신체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부터다. 개업풍선 같은 몸놀림이 아니라 상체와 하체의 리듬, 그리고 선형을 그리는 신체의 중심을 이해한 공은 손바닥을 가볍게 타고 가운데 손가락 끝을 휘감으며 나아간다. 이때는 공이 손을 미처 떠나기도 전에 내 눈앞의 상대가 아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상대방은 내 공을 피하지 않고 잡기 위해서 낮은 자세를 취했지만, 역시 예상대로 공은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공은 상대방의 품이 아니라 얼굴 중앙에 고스란히 충격을 가했고, 피구공은 친구의 코뼈에 금을 내고 말았다. 얼굴 중앙이 빨갛게 퉁퉁 부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왜인지 서럽게 울었지만, 오히려 코뼈 고통의 당사자는 씩씩하게 양호실로 갔다.

    여자아이들은 축구나 농구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짐에도 소녀들은 종종 스핀 먹은 피구공으로 뼈를 부러뜨리고, 단체 줄다리기에서 팔뚝만 한 밧줄을 어깨에 메고 당기다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발야구에서 몸을 날리다 다리의 옆면을 바닥에 고스란히 쓸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종류의 부상은 다 계집애처럼 굴지 않다가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움직임의 미숙함보다는 이기고자 하는 과도한 승부욕에서 비롯되며 부상은 언제나 허무하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이 사건을 나의 최초의 공 던지기로 규정짓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결코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피구공으로 상대방의 코뼈에 금을 낸 일은 실제로 나의 기억에 강력하게 남아있으면서도 종종 여자아이들의 과격했던 공놀이를 증언할 때, 즉 ‘계집애처럼 던지기(Throwing like a girl)’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할 때 좋은 말할 거리가 된다.

    독일계 현상학자이자 신경의학자인 어윈 슈트라우스(Erwin straus)는 공을 던지는 행위에 남녀의 현저한 생물학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소녀의 여성스러움(feminine)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발견되는 본질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아이리스 매리온 영(Iris Marion Young)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이 오래된 주장에 신체 차이는 근육의 힘이나 공감각적 능력의 부족이 아닌, 여자들 스스로 정수기 통을 갈아 끼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데 있다고 반론한다.[각주:1]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 속에서 나의 다소 과격한 최초의 공 던지기는 여자들을 임파워링 한다. 여자들이 운동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운동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야기는 여자들의 신체에 대한 서사를 갱신하고 있다. 내가 기록하는 최초의 공 던지기의 기억은 거짓이나 조작이 아니라 지금의 시간성 위에서 정동되는 새로운 인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내재화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은 옷장을 비워내고 마른 몸의 강박에서 벗어나 근력을 키우는 새로운 취미활동을 찾아 나선다. 신체를 통한 탈여성성의 표현은 궁극의 변화, 예컨대 치토스 팔뚝을 가진 여자들이 사각팬티를 입고 투포환을 던지거나 남자를 은유적으로 죽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자들을 임파워링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운동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들이 고백하는 서사 또는 언제나 운동을 좋아하고 지속적으로 해왔던 여자들 기억으로의 갱신은 또 다른 여성성의 표본을 채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섣부른 생각이 든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가 내재성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것, “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객체로 인식되었다는 것[각주:2]에 모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는 지속되지 못하고 여자아이들이 자신을 여자아이로 인식하는 특정한 순간에 작동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시간표에 체육이 있는 날에는 하얀색의 체육복을 입고 가야 했는데, 흰 체육복은 편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 점심메뉴가 무엇이었는지 더 잘 보이게 했다. 그러나 신경 쓰였던 것은 배꼽 즈음에 묻은 검붉은 소스가 아니라, 햇빛 아래에서 더욱 잘 비치는 안에 입은 속옷이었을지도 모른다. 체육복은 편했지만 흰색의 옷은 종종 움츠러들게 했는데, 이것은 나의 운동 능력을 발휘하는데 분명히 방해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상황과 조건 안에서 ‘인식’을 통해 작동된다. 이 경우에는 첫 번째, 햇빛 아래에서 흰색 옷을 입었을 때, 두 번째, 피구나 발야구같은 ‘소녀화’ 된 종목이 아니라 남자애들과 함께 부딪치는 농구나 축구같은 종목을 해야 할 때, 세 번째, 다른 여자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로서 운동 능력을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어려워진다.

    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보자. 투니버스 보던 시절, 애니메이션에서 여자아이들이 뛰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안짱다리의 극대화, 앞이 아니라 안팎으로 휘두르는 팔, 높은 톤의 괴상한 숨소리, 그렇게 뛰는 소녀들은 당연히 쉽게 지치고 넘어졌다. 왜 저렇게 뛰어? 왜 여자애들은 옆으로 뛰는 거야? 아무리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 2D 인간이라고 해도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해부학적으로도 불가능한 뜀박질이었다. 팔다리가 제 맘대로 움직이겠다고 제각각 고집을 부리지만 통합된 몸뚱이의 주인은 오히려 당황하며 휘둘리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면보다 측면 공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솟아오르거나 가라앉은 공기를 헤집는 것에 가까웠다. 모험을 떠나지만 쫓고 쫓기는 급박한 사건에 마주하면서 여자 주인공들은 로봇처럼 어려운 일보다 쉬운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나는 몰입을 위해 비효율적 움직임들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극 중 전개에 따라 ‘계집애’인 척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실제로 그렇게 뛰어다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2D 인간만큼 과장된 몸짓은 아니었지만, ‘여자아이가 뛰다’라는 문장을 몸으로 설명하는 스피드 퀴즈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유사 뜀뛰기는 교실 두 개를 지나치기도 전에 끝났으며, 그 행위는 나 같은 애와 놀아주기 싫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헤집고 복도의 끝과 끝, 1반부터 8반까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계집애였던 나는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 왜 그렇게 뛰는지? 질문받았고 나도 마찬가지로 왜 그렇게 뛰는지? 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했다. 왜 그렇게 뛰어? 왜 그렇게 뛰어? 우리는 그렇게 각자 뛰었을까?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대표화되는 것들의 표본은 언제나 한정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더불어 계집애의 안장 다리와 달릴 때마다 엉켜버리고 마는 통합되지 못한 여성의 신체는 더 이상 지금의 시간성 안에서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 같은 계집애는 스크랩북에 채집된 계집애를 던져버리기로 한다. 계집애를 던지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1. 영은 여자들이 몸 전체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관련이 있는 신체의 부분에만 힘을 집중하며 움직임을 스스로 억제하는 경향을 발견한다. 네가 여자로서 정수기 생수통을 갈아야한다면? 생수통에 몸을 최대한 붙여 하체의 힘으로 들어올리기보다는 전완근에 힘을 무리하게 주다가 실패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Iris Marion Young, Throwing like a girl, On Female Body Experience,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5, p.34. [본문으로]
  2. The three modalities of feminine motility are that feminine movement exhibits an ambiguous transcendence, an inhibited intentionality, and a discontinuous unity with its surroundings.” Iris Marion Young, Ibid., p.3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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