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험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여자들에게 좋은 것일까? 내가 농구 하는 것, 스포츠 시장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공공장소를 점유하기 위해 부딪치고 맞서 싸우는 것, 학창 시절 운동장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것 등 나의 고유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을 추동하는 동시대의 여자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에세이는 응당 보편성을 획득하거나 진정성을 품거나 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셀링 포인트로 삼아야 하는데, 이 연재는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은 누가 읽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면 농구 하는 친구들은 정작 내가 쓰는 글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스포츠라면 하는 것보다 보는 것에 가치를 두는 대학원생들이 읽어준다. 어쨌든 나는 여자들에게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나의 고유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 도움 되긴 하는 걸까. 차라리 3500치는 유튜브를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또 다른 여자들의 경험과 관계 맺기에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나는 여성 서사에서 전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경험을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의 시간에 발을 딛고 미래의 시간을 꿈꾸는 휴머니즘적 SF 쓰기에도 소질이 없다. 여자로 사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인 것은 맞지만, 결핍과 상실, 경멸과 혐오의 전형적이고도 상투적인 이미지가 누구의 관점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생각해보면 이 오랜 오해들을 계속 사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동시대에 여자로 산다는 것은 사실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타자로 경험되고, 여자들의 경험이 타자의 것으로 기록되고, 이러한 타자의 집단을 향한 오염의 징후를 내면화하기[각주:1]에 관심 가지기는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전형적인 여성 서사가 피해자의 위치와 조응하지 않더라도, 이 연재에서 지금껏 풀어낸 그리고 풀어낼 나의 경험들은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모든 여자를 위한, 동일시 가능한 서사 쓰기에서 자꾸 조금씩 미끄러진다. 나는 체육 시간에 벤치를 지키기보다 학기 초에 체육부장으로 뽑히는 것에 익숙했고, 공공장소에서 길을 내어주지만 동시에 몸을 상하좌우 움직이는 적당한 반경을 차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동시대의 여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여자로 살아내기가 얼마나 고된 일인가 경험을 공유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천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건 조금 눈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아니, 오히려 이거야말로 여자들을 임파워링 하는 이야긴가?

    하지만 나의 신체()말하는 것은 기---결이 명확하고 플롯이 탄탄한 서사를 모방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쨌든 지만, 주인공답지 않은 면모들은 단일하지 않은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 단일하지 않다는 것은 너와 나, 우리가 다른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신체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자, 동시에 나의 신체조차 오늘-내일, 과거-미래, 여기-저기에서 다르다는 것[각주:2]이다. 예컨대 나에게 운동장이라는 공간은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운동하기 딱 좋은 선선한 저녁 시간에 남자들이 점령한 농구코트를 견딜 수 없어 새벽의 빈 코트와 여자들만 모여있는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편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일관성 없는 사건들은 모두 나의 신체에서 일어난 일이다. 체육부장으로서 는 구조적 힘에 저항하는 전복적 주체가 되고, 남자들이 점령한 야외 농구 코트에서 자리를 피하는 는 체제를 내면화한 순응적이고 순종적인 주체가 되는가? 또는 전복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순응적인, 바로 그 유명한 중립적인 몸인가?

    이것은 전형적인 여성의 경험인 것 같으면서도, 여성의 경험이 아닌 것 같은, 그렇다고 90년대 스타일의 근대적 주체로서 난 나야[각주:3]도 아니다. 진정성 있는 서사를 위해서는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짜 나, 그 고유한 자질을 1.‘발견하고 스스로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모습을 시종일관 2.‘유지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각주:4]인데 일관성과 연속성이 없는 이 경험은 언제, 어디서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붙거나 소거된다. 그럼 이왕 씩씩하고 야무지게 구는 거라면 계속 잘할 것이지, 종종 예측 불가능한 뒷걸음질로 여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여자의 경험이 대체 어디에 좋다는 것일까? 물론 이 연재는 보편적인 경험의 일환으로서 차별의 고발을 통해 과학의 시도들에 물음을 던지기도 하고, 살림에 도움이 되는 생활체육과 피트니스 팁도 간간히 준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과하는 고발은 명쾌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해답을 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냥 단지 말하기에 초점을 둔다. 이는 내가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말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통과하는 것이 나의 신체()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신체가 경합하는 것들을 정치적인 것으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신체의 경험 말하기를 정치적인 지식 생산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아마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의 유명한 구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를 곧바로 떠올릴 것이다. 이는 여성들의 경험을 단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거대한 구조적 힘이 존재를 거듭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는 오해들을 고스란히 떠넘겨 받을 수 있다. 나는 이 문장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쓰고 싶은 욕망을 매우 참았는데, 왜냐하면 이는 더 이상의 긴 설명을 포기하기, 그리고 오해로 인한 어떤 한계를 인정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인정하기는 우리가 가진 고민을 해결하고, 더 나은 고민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윤리적인 태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인정하는 어떤 한계는 오해들로 인해 정체되어 있는 페미니즘의 정치적 손해, 설명력과 생산력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해의 가능성과 경합하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품은 단일한 주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하고 설명하기, 그리고 다시 경합하고 관계 맺기라는 대화와 협업을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담론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개입하기를 요청한다.

    페미니즘에서 몸은 언제나 문제적인 것이었다. 여성의 신체에 접근하는 생물학적, 사회구성주의적 방식이 사실로서 권위를 얻은 과학의 시도들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신체가 경합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페미니즘 설명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각주:5] 해부학이나 담론으로 구성된 효과를 드러내는 관점이 가진 의미와 한계를 이해하고 물질의 경합과 관계 맺기(engagement)를 말하게 된 이론적 성과들은 나의 신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정치와 지식의 생산으로 개입하도록 해준다. 팽팽하고 느슨한 긴장들을 생산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나의 신체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여기에 불러온다. 이것은 본격 농구 하는 연재이지만, 동시에 하나가 아닌 몸, 연속적이지 않은 몸, 나도 모르는 나의 신체들이 경합하는 장소들을 정치적으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시도이기도 하다.

  1. 아이리스 매리언 영, 「몸의 등급 매기기와 정체성의 정치」,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 조국 옮김, 모티브 북, 2017, 321쪽. [본문으로]
  2.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를 통해 서양 형이상학이 신체를 사유해 온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신체를 힘과 역량이자 외부의 다른 힘들과 맺는 관계로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과 정신에 대해 언급하고, 이 모든 것에 관해 떠들고 있지만,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것에 속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2001, 85쪽. [본문으로]
  3. 라떼는 유명했던 리바이스 광고 카피. [본문으로]
  4. 이는 의심, 비판적 사유, 그리고 과학이 결합한 부식에 의해 녹아버렸다 하더라도 여전히 진정성이 가진 주류적 의미는 그렇다. 찰스 귀논, 『진정성에 대하여』, 동문선, 2005, 15쪽. [본문으로]
  5. Megan Warin, Material Feminism, Obesity Science and the Limits of Discursive Critique, Body and Society, Vol. 21(4), 20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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