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 나의 신체(들): 허주영(출판)
- 2020. 5. 27. 14:07
아마추어 농구선수로서 코트 위의 나는 메인 캐릭터라기보다 부캐에 가깝다. 김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나 박나래의 ‘조지나’같이 인종, 계급, 세대 등 특정 조건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본캐와 부캐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얼굴 근육, 목소리 톤, 단어 선택, 그리고 걸음걸이 등 크고 작은 습관들의 차이가 발생한다.
캐릭터를 넘나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간의 강박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고, 상대방이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 일종의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관계 맺기에 주저하지 않고 참여하려 든다. 어떤 공간에 놓였는가, 누구와 어울리는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치고 빠지는, 또는 새롭게 획득하는 습관들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면서 쌓여간다. 예컨대 철학자의 저서를 발간연도로 말해놓고 서로 알아듣자 깔깔대는 사람들과 있을 때와 3대 몇 치는가 논쟁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이렇게 서로 다른 그룹에서 같은 톤으로 존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이동과 생성은 능동적인 계획이나 의도가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여태 몇 개의 캐릭터를 생성했고, 그중 몇 개의 캐릭터가 활성화 또는 비활성화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문득 캐릭터 간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다소 새삼스러워서 누가 진짜 (또는 가짜) 나인가, 나여야만 하는가 생각해보았는데 아직 결론이 안 났다. 더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 캐릭터가 분명 본캐여야만 하는데, 억울하게도 인과관계의 규칙에 따라 정해진 본캐가 ‘진짜’ 나에 가까운가 생각해보면 어딘가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 같다. 그렇다면 본캐는 사실 부캐일 수 있고, 부캐는 언제나 본캐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약 진짜가 진짜 있다면, 왠지 지금-여기 없고 미래에 희미한 불빛으로 흔들리고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현재의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불평도, 미래에 부캐와 본캐가 감격스러운 자아 통합을 이룬다는 예언도 아니다. 1
취미로 스포츠 하나쯤 안 하는 주변의 연구자들 앞에서 나는 특출난 스포츠맨인 척하고, 농구맨들 앞에서는 메갈 대장이지만 이러한 캐릭터 붕괴의 순간은 불쾌하거나 섬뜩한(uncanny) 느낌으로 맞닥뜨리기보다, 오히려 잠깐 질서를 흩트려놓거나 환기시키는 아주 작은 희열로 온다. 게다가 이것은 익숙한 감각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를 가로지를 때 발생하는 긴장감은 물리적으로 신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나는 익숙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나와 나의 공동체를 지키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보통의 것들을 만들고 또다시 갱신하기를 반복해야 할 것인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톰보이>에서 톰보이 ‘로레’는 이사 온 동네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소개한다. 어느 날, 친구들은 축구를 하고 ‘미카엘’은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대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남자아이들의 웃통 벗기와 바닥에 침 뱉기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다른 날 경기에 참여해 티셔츠를 벗고, 골을 넣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규칙들을 충실히 지켜나간다. 또 친구들과 수영을 하기로 한 날에는, 옷장에서 원피스 수영복을 꺼내 가위로 잘라 능숙하게 쇼츠를 만들고, 그 안에 넣을 플레이 도우 뭉치를 준비한다. ‘로레’가 축구와 수영을 할 때 상체 탈의를 하기 위해서는 ‘미카엘’이 되어야 했지만, ‘로레’의 신체가 놓인 집과 ‘미카엘’의 신체가 놓인 숲은 서로 특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과 부딪치고 공동체를 사랑하게 된다. ‘미카엘’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신체와 관련된 사건들을 그럴싸하게 처리하고 상황을 모면하지만, 엉성하게 ‘미카엘’과 ‘로레’에 들러붙어 있는 것들은 하루 만에 접착력이 다할 것 같아 동시에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하다. 밖에서는 ‘미카엘’, 집에서는 ‘로레’를 하다가 개학이 다가오자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미카엘’은 ‘로레’를 들키게 된다. 2
무슨 일이 있어도 개학 전에 ‘로레’가 여자아이임을 동네방네 알려야 하는 엄마는 굳이 ‘로레’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혀 아파트 단지를 함께 돌아다닌다. 빨간 반바지와 회색 민소매 위에 파란 원피스를 입고, ‘미카엘’이 사실 ‘로레’였음을 증명하려는 시간은 유쾌한 장면들 속에 낮게 깔려있던 긴장감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관객들의 숨통을 조인다. 참지 못한 ‘로레’는 엄마의 양육자다운 태도가 불러온 장면에서 도망쳐 숲으로 뛰어 들어가 파란 원피스를 나무에 걸어둔다. 바람에 흔들리는 원피스를 뒤로하고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 그리고 수영을 하고 온 ‘미카엘’이 유치乳齒를 넣어놓은 박스에 플레이 도우 뭉치를 넣는 장면을 나란히 세우면, ‘로레’와 ‘미카엘’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떠나보내는지 예측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이제 학교에 가면 ‘로레’인 채로 친구들을 사귀겠지만, 원피스 같은, 그런 옷은 절대 입지 않겠다는 것을.
소녀 되기에 실패한 아이는, 소년 되기에도 실패한다. 객관화되어 있는 것들은 쉽게 미끄러지고 규칙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은 낯설지만, 미끄러짐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여름의 불쾌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놀이들로 이어진다. 어릴 때는 불안정한 삶들이 부러웠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것,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되는 것, 손가락이나 목에서 우두두둑 소리가 나는 것, 소풍 갈 때 김밥 대신 유부초밥 싸 오는 것,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것, 안경을 쓰는 것. 부러운 것들을 가지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면 그건 나쁜 것이라고 했다. 여유가 없거나 외롭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삶의 지표이건 아니건, 당시 내가 불안정한 것들에 진심으로 매료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동경했던 것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삶의 질서를 지키거나 어기는 방법을 몰라도 오히려 나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가치 있는 것들에 이끌리는 힘이 뛰어나다고 믿는다. 불안정한 것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발생시킨다.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실패하는 힘과 지속되는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규칙들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여기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는 중이다.
- 분명 에세이를 쓰기 전에는 나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나의 서사를 다시 구성하고 쓰는 행위는 경험들의 지평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본문으로]
- “메를로퐁티의 관점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나 육체적 도식과 특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외부 공간에 대한 관념을 포착한다. …… 우리는 감각을 통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공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처한 상황을 통해 공간을 파악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스, 「체험된 몸: 현상학과 육신」, 『몸 페미니즘을 향해: 무한히 변화하는 몸』, 임옥희·채세진 옮김, 꿈꾼문고, 2019, 221~22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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