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혐오』 서평 / by 희음
- 모두의 리뷰
- 2020. 5. 18. 11:22
“영리한” 증언자와 “영리하게” 연대하기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압도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포스팅이 있었던 2019년 4월 16일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윤지오의 증언, 즉 그의 ‘메시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일을 포기한 채 윤지오라는 ‘메신저’ 쪽으로 시선을 틀어버렸다. 윤지오라는 사람의 인격은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 지배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윤지오 증언이 갖는 의미 모두를 부정하는 방향을 택하지는 않았다. 그가 설령 순수하지 않은 메신저일 순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의 무게와 중차대함까지 부정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럼에도 나는 피로를 느꼈다. 윤지오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그와 맞잡았던 손을 놓고, 윤지오의 신변보호에 대해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이 그의 말이 과장됐다며 돌아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만한 이유’가 어떤 이유인지, 그 이유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된 것인지, 또 그 이유가 그로부터의 등 돌림을 합당하게 할 만큼 절대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기는 한 건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미리부터 피곤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그라는 메신저와 그의 메시지 모두로부터 시선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책과 『까판의 문법』을 읽겠다고 나선 걸 보면 적어도 내게 최소한의 책임감은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양보 없이 윤지오의 곁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연대자 그룹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과 이 책의 저자가 없었다면, 나는 이 부끄러움을 직면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다.
‘메신저’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나는 사실 윤지오 증언이 어떤 계기로 우리에게 처음 와 닿게 된 것인지조차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먼저 “미투-위드유 봉기가 다중의 섭정 정치 형태로 표현된” 국민청원인,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 청와대 국민청원(2018년 2월)이 있었다. 당시 미투-위드유 운동의 반대편에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그럼 장자연은?’, ‘장자연이랑은 연대 안 하나?’, ‘죽은 사람만 불쌍해’를 말끝마다 되풀이하며 조롱하던 이들이 생각난다. 그런 비웃음을 다시 비웃어주듯 청원은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같은 해 4월 2일에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사전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고, 5월에는 재조사 권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흐름에 용기를 얻은 윤지오는 2018년 여름, <PD수첩>의 “고 장자연” 인터뷰에 응하게 됐고, 진상조사단의 조사 요청에도 응하기로 결심했다. 정식 조사에 앞서 윤지오는 사건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천의 성추행 현장에 대해 증언했고, 이 증언을 기해 조*천은 기소됐다. 이를 계기로 윤지오의 증언은 드디어 2019년, 장자연 리스트의 일부 내용을 증언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이 바로, 김수민으로 하여금 윤지오라는 ‘오염된(즉 “영리하”고 “거짓말하는”) 메신저’를 생산하게 하고, 윤지오라는 사람에 대한 의심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매개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수민은 애초 윤지오가 리스트를 본 적이 없으며 윤지오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야 그 비슷한 것을 보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수민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지극히 얕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취중 대화를 바탕으로 하여 리스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김수민의 ‘폭로’는 윤지오의 현재 진술과 엇갈릴 뿐 아니라, 2009년 수차례 반복된 윤지오의 진술과도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지오는 2009년부터 일관되게 리스트를 보았다고 말해왔다. 장자연에게 문건과 리스트를 쓰도록 도왔던 것이 유장호인데, 그와 윤지오와의 2009년 통화 내용에서 그 리스트가 언급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며, 가족(장자연 친오빠)의 요구로 봉은사에서 리스트가 불태워질 당시에도 그 리스트의 존재를 보았다는 진술을 윤지오는 2009년과 2019년 모두 동일하게 해왔던 것이다.
윤지오라는 메신저를 통칭하게 된 (부정적 의미의) “영리”함 역시, 책 『13번째 증인』 출판을 통해 윤지오가 “영리하게”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다짐한 것에 대한 왜곡의 효과로서 창출된 개념에 불과하다. 김수민과 박훈은 윤지오의 영리함을 “영악”과 “가식”과 “사기”로 몰아갔고, 거기에 가로세로연구소(김용호)와 김대오까지 가세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윤지오의 증언 행보 전체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 영리함의 중심에는 윤지오의 ‘후원금 모금’이 있다. ‘돈’이라는 세속적 매개물이 섞여든 것만으로 윤지오는 “사기꾼”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후원금 모금의 배경은 ‘죽임당할 위협’이었다. 김수민을 비롯한 ‘탈진실 공모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그 위협감과 공포가 실재하지 않으며 공포에 대한 근거가 없다며, 그 또한 거짓이며 사기라고 주장했다. 장자연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그가 기록하고 남긴 건 성착취 카르텔을 구성하는 숱한 이름들(리스트)과 성폭력에 관한 사실들의 나열(문건)이었다. 유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불태워졌지만 2009년에 남겨진 관련 증언과 증거들이 그것이 유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봤던 윤지오가, 이번엔 그 죽음의 차례가 자신에게 왔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굳이 윤지오가 아니더라도, 실재하지 않고 입증되지도 않는 공포가 여성들의 일상 안에 산재해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안다. 말했거나 말할 수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임당했다(고 믿는다)면, 말을 품은 채 남겨진 한 사람을 압도하는 감정이 무엇일지 우리 모두가 안다. 그 무형의 감정은 실재하는 유형의 일상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도록 할 만큼 지나치게 실재한다.
이제 모금에 관해 되짚어보자. 2019년 3월 동안 줄기차게 쇄도했던 네티즌들의 요청이 반영돼,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에 의해 3월 15일 방송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표된 바 있다. 하지만 윤지오는 이 제안을 거듭 거절했다. 그러던 중 윤지오는 3월 17일 <4·16 기억저장소>에 개인 후원금을 기부하러 갔다가, 한 희생자(학생)의 어머니(기억저장소 소장)로부터 기부금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는 사람들의 호의에 대한 예(禮)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윤지오가 자신의 그 단호하던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리고 3월 18일,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으로 15시간 5분 동안 1억 1천 7백만 원이라는 후원금이 입금되는 “사건”이 기록된다. 여기에는 익명 혹은 격려 문구로써 입금인 란을 대신한 이가 실명 후원자 못지않게 많다. 무조건적 증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후원금 ‘운동’이, 국가가 해주지 않는 윤지오의 신변보호를 시민이 대신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 할 때, 이는 “증인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려는 범사회적 “연대”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윤지오의 진실증언 증여에 대한 답례의 증여로서, 진실규명과 진실승리를 위한 용기와 연대의 공통장을 구출하는 힘의 출현”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정의내림을 차치하고라도, 모집행위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는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변호사인 박훈, 최나리는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하면서 윤지오를 불법행위자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후원자 중 누구도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여기지 않은 때였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최나리가 진행하는 무료 반환청구 소송에 함께하자고 주체 격으로 이를 촉구하며 이 일에 앞장선 것은 후원자조차 아니었던 김수민이었다. 그 집요하고도 오랜 주문과 부추김 끝에 겨우 439명이 움직였다. 5,745명의 신한은행 후원자 중 439명이 김수민에게 이끌려 “김나리의 소송에 동의 서명”을 한 셈이다. 3
이 외에도 지면 사정상 다 담지 못하는, 윤지오라는 사람의 인격에 대한 음해와 모략들이 실로 난무했는데, 김수민의 저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첫 포스팅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이 모든 논의들은 박훈 변호사의 고소·고발(김수민 작가 대리의 명예훼손 고발, 모금 빌미 사기 혐의로 고발)에 의해 사법 영역으로 휩쓸리듯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시민들의 사회적 토론의 장은 일거에 말소당했고, “다중들은 그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경꾼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기서 가슴 아픈 일은 윤지오가 ‘마녀사냥’당해 결국 이 나라에서 추방된 일뿐만 아니다. 저자의 지적대로 ‘누가 왜 장자연을 죽게 만들었는가?’라는 그 절실했던 사회적 물음이, ‘윤지오는 사기범죄자인가?’라는 사법적 물음으로 추락해버린 일이 더욱 뼈아프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만 하지 않을까.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이자, 국민적 요구와 열망에 응답하고 자신의 증언을 순수증여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윤지오가, 이 땅에서 추방되는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힘이 그것을 추동하는가를. 또 윤지오의 그 순수하지 못한 ‘오염된 여성’ 이미지는 누구에 의해 촉발되고 재생산되었으며, 그 이미지의 고정화는 결국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를.
이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위협하는 여성-소수자가 있다고 할 때 그를 순수하지 못한 존재로 만들어 이를 마녀화하는 흐름이 편재한다면, 이 흐름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지배적 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남성 권력 다수자 집단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여성 마녀화 이미지 생산을 위해 제시하고 동원하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의 정중앙엔 가족중심주의와, 증언할 자격에 대한 강조가 있다.
가족중심주의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윤지오는 비난받았다. 장자연 가족의 뜻을 거스르고서 장자연 사건이 담긴 『13번째 증언』을 출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중심주의에 의거한 이런 식의 비난은 출판과 증언을 통해 사회적·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실천을 하고자 했던 그의 선한 영리함을, 사적 영리 취득을 위한 악한 영리함으로 보다 쉽게 둔갑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증언들과 정황으로써 드러나고 있는 바로 그 장자연 리스트, 그것을 불태우기로 결정하고 실행한 것이 누구인가를.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장자연의 친오빠다. 사건 해결의 열쇠가 들어있는 결정적 증거물을 그의 가족이 없앤 것이다.
증언할 자격에 관해 말할 차례다. 윤지오는 장자연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자로서, 시민의 바람과 요청을 디딤돌 삼아 메시지를 전하러 이곳까지 왔다. 그는 메시지의 순수증여 행위를 했다. 그런데 이후 그가 시민 연대자들로부터 모금이라는 이름의 순수증여를 받자마자, 그라는 ‘메신저’가 주목받게 됐고 윤지오는 그 즉시 영리한 사기꾼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증언자에서 잠재적 범죄자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증언할 자격을 갖추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수증여로서의 연대에 응답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자살당할’ 위험과 위협감 속에 있다 해도 순수한 증언자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곧 증언하려는 ‘살아남은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뿐 아니라, 이미 언제나 죽음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결국 살아서 ‘증언’할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순수라는 자격에서 원천적으로 탈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죽은 장자연을 위해서는 윤지오를 죽여야 한다”는 박훈·김대오·김수민 트리오의 “리트로넬로”에 저자가 치를 떠는 것도, 그들의 언술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을 읽었기 때문인 게 아닐까.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더 이상 증언할 수 없다. 증언할 의지가 있었고, 또 더 이상은 고통받지 않고 살기 위해 고발 문서의 형식으로써 증언했음에도, 그 모든 증언 문서가 ‘유서’로 치환되고, 증언 직후의 알 수 없는 죽음이 ‘자살’로써 과거사(史)화되고 만 사건의 당사자가 이미 죽은 자라면, 그는 혼자서는 무엇도 밝혀낼 수 없다. 살아있는 자의 “영리한” 증언과 실천만이 사건을 빛 쪽으로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 그 사건 뒤에 숨은 모든 추악한 남성 권력 카르텔과 여성에 대한 학대, 착취, 제노사이드를 폭로할 수 있다.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증언만으로 이 일을 완수해내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장자연이라는 증언자의 증언을 윤지오가 이어받고,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이 그것을 빠짐없이 팔로업하고, 조정환이 이를 기록하고 출판하는 식의 “영리한” ‘증언릴레이’가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가야 할 것이다. 더 많은 “영리한” 이들이 “생명의 눈”을 부릅뜨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며 시선을 주고받을 때 “증언혐오”라는 흐리멍덩한 눈은 마침내 비탈 아래로 쓸려 내려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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