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 아워스> 리뷰 / by 위단비

욕망의 발견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된 후에도 텅 빈 채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돈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아무런 의욕 없이 유투브를 뒤지며 올해의 웃긴 영상들을 통해 어떻게든 무언가를 느껴보려는 몸짓을 하는, 나른해진 몸을 침대에 뉘인 채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수 만명의 사람들. 그들의 텅 빈 공간은 스마트폰 혹은 술과 사람들이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들 중 누군가는 침대에 누운 그 순간에 텅 빈 껍데기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 때에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이 잘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모른다는 것을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멈출 수 없는 존재들이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해서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가 뭘 원하는 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지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의식적인 행동과 사고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텅 빈 공간을 발견하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어떠한 욕망조차 없는 텅 빈 공간. 그래서 서둘러 스마트폰을 보고 약속을 잡고 음식과 섹스를 찾는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치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의 삶의 이유에 상대의 자리를 놓아버리는 것,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의 모습을 바꾸는 것,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본인의 욕망을 실현해내는 것. 댈러웨이 부인과 리처드의 관계는 그런 모습의 전형을 보여준다. 댈러웨이 부인은 리처드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본인의 삶을 희생하고 리처드를 위해 전념을 다한다. 리처드의 시상식 파티를 준비하고 그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본인의 슬픔을 삼켜낸다. 하지만 리처드에겐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것이 또 다른 희생이었다. 그저 죽는 순간만 기다리는 리처드에게 그런 댈러웨이의 모습은 또 다른 억압이고 그저 댈러웨이 자신의 욕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댈러웨이는 리처드를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리처드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 욕망에 자신보다 더 많이 리처드에게 자리를 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리처드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댈러웨이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둘은 그렇게 본인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관계를 맺어간다. 그러다 마침내 리처드가 본인의 욕망을 실현해내는 그 순간 댈러웨이는 비로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리처드로부터 듣는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에 비로소 관계는 서로를 만나게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기차역 씬은 그 모습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차마 말하지 못한 욕망을 남편에게 표현했을 때 뜻밖에도 남편은 그런 버지니아 울프를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남편으로서는 본인의 욕망을 접어내는 일이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욕망과 본인의 욕망의 충돌지점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난 이후이기 때문에 적어도 희생이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 씬이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이란 욕망의 솔직한 표현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상대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사람들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충돌은 표현과 소통을 통해 주고받음과 조율이 가능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개인의 텅 비어버린 공간을 차지하는 사회의 욕망이다. 브라운 부인의 삶은 의무로 가득 차 있었다. 브라운 부인의 이웃이 보여주는 과장된 즐거움과 임신 소식을 알리며 보여주는 복잡한 표정은 그녀의 삶 또한 브라운 부인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통된 느낌을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느끼는 둘은 서로를 눈빛만으로 위로한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은 어쩌면 처음으로 본인의 욕망을 그 자리에서 실현한다. 짧은 키스와, 자리를 뜬 이웃. 이제 브라운 부인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남편을 위한 케잌을 만드는 것을 멈추고 본인의 욕망대로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 죽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텅 빈 공간은 어째서 생긴 것일까. 죽음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한 거라는 그녀의 말은 무슨 뜻일까. 그녀에게 죽음같은 현실이란 나라는 사람 스스로의 이유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남편과 아이와 주어진 의무로 움직여야 하는 현실을 뜻한다. 살아간다는 것의 주체는 나지만 현실이라는 단어는 ‘나’라는 주체가 빠져 있다. 주도적이지 않은 삶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힘들고 곧 죽음처럼 느껴질 것이다. 키스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아이로 대변되는 의무를 뒤로 한 채 브라운 부인을 움직이게 했고 움직임 끝에 기다리던 현실은 비록 같은 현실일지라도 더는 죽음과 같은 현실이 아닌 브라운 부인의 ‘삶’이었을 것이다.

    브라운 부인의 공허는 텅 빈 공간이 먼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의무로 주입되는 사회의 욕망이 본인의 욕망을 찾을 수 없게 만들고, 나의 욕망이 차지해야 하는 자리를 텅 비어버리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마트폰을 보며 공허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찬 이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슷할 리 없는 개개인의 욕망이 이렇듯 비슷해 보이고 모두가 비슷한 공허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또한 세상으로부터 주입되는 욕망이 아주 사적인 공간까지 침투해 있어서일지도.

    텅 빈 공간을 만나면 우린 살아있기 위해 조금 더 치열하게 스스로를 만나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욕망을 좀 더 의심해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텅 빈 공간을 인정하고 그것을 채우려는, 혹은 채우지 않으려는 욕망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다. 삶을 무엇으로 채우고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순간에 쉬어갈 지는 순전히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고독이 가장 좋은 친구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고독으로 대변되는 삶의 여백이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인 이유는 그 순간 나의 욕망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어둠 속의 고통받는 자신은 자신밖에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고통받는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구원으로서의 욕망 또한 고독 속에서 만나는 자신밖에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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