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전장> 리뷰 - 적은 누구인가 / by 김경진
- 모두의 리뷰
- 2019. 8. 13. 17:26
포스터부터 봅시다
SNS상에서 어느 날 묘한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포스터를 배포한 배급사는 시네마달, 주전장이라는 영화의 포스터였습니다. 포스터를 보자마자 사전 정보가 없이도 대번에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할지 감이 잡힙니다. 우선 이 영화는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일 것입니다. 세 개의 이미지가 층을 이루며 쌓여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중첩된 이미지의 중앙에 자리한 것은 소녀입니다. ‘소녀’는 일견 단순한 오브제입니다. 우리는 그간 소녀를 너무 단순하게 사용해 왔습니다. 소녀는 무해하고, 연약하고, 피해자이고, 앉아있으며, 보호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소녀상을 끌어안았고 어떤 사람은 소녀를 꽃에 비유합니다. 때때로 ‘위안부’를 다룬 콘텐츠들은 정치적인 시선을 배제한 채 약한 소녀들이 피해를 입는 모습 자체를 집중 조명해 왔습니다. 이런 접근은 감성적이고, 보기 좋고, 공감을 이끌어내기 쉽고, 흡입력 있지만 때때로 그 피해가 현재 진행 중이며 소녀들은 약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당연한 사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전장의 포스터는 좀 다릅니다. 소녀는 클로즈업 된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피하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향하는 시선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집니다. 그런 소녀의 이미지 위쪽에는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지닌 군중의 이미지가 자리합니다. 그 군중의 이미지 구역은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도록 커팅되어 있습니다. 소녀의 이미지 아래쪽에는 군화를 신고 행진하는 발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이미지 구역에서 시선이 가장 높은 부분은 왼쪽입니다. 그럼으로써 가장 위쪽의, 군중의 이미지와 맞부딪힙니다. 이 부딪힘 자체가 주전장의 큰 틀입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 바로 아래, 포스터 전체의 중앙에 가까운 구간에 글귀 하나가 지나갑니다. ‘당신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이 글귀의 폰트는 작지만, 충분히 두껍고 그림자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귀에 그림자를 부여했다는 것은 ‘당신’의 존재가 현상을 해결하는 주체이며, 위안부라는 사건 자체가 아직 미해결인 채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위안부는 실체이며,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덮으려는 의지도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당신도 이 현상에 뛰어들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글자는 뛰어듦의 힘 자체를 (그림자를 가지고) 선언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가지는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포스터 디자인에 쓰이지 않는 원색의 빨간색이 쓰이고, 웬만해서는 포스터 디자인에 쓰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폰트로 타이틀이 새겨집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주전장’. 이 포스터 한 장이 끊임없이 외치는 것은 ‘힘’ 입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힘, 맞부딪혀 쟁취하는 힘, 진실에 접근하는 힘,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가지는 당신의 힘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감성’으로 움직이는 모호한 현상이 아니라 두 집단이 각자의 진영논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부딪히는 명징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일이 아닙니다. 전쟁하고 쟁취하는 과정 속에 아직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느 편에 서서 전쟁을 끝낼 것인가, 당신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목격한 자의 책임입니다.
확장-객관의 힘
주전장을 제작한 감독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입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기사를 쓴 기자가 일본 우익 진영에서 몰매를 맞는 것을 보며 왜 그토록 그들이 이 문제에 반응하는지를 궁금히 여기게 됩니다. 이 개인의 궁금증이 진영을 망라하는 논쟁으로 확장되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감독은 그 궁금증 하나에 의존해 3년간 한국, 일본, 미국을 넘나들며 진실을 추격합니다. 그 추격으로 만나지는 것은 정치인, 언론인, 역사학자, 법학자, 인권활동가, 피해 당사자, 가해 당사자들의 논지가 숨가쁘게 엇갈리는 전쟁의 판입니다.
감독은 작품 내부에서 피해자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사건을 변형하거나 매장하려는 우익 인사들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도 토로하지 않습니다. 추적의 결과인 증거들을 순서대로 열거하고 각 진영의 논리를, 본인의 소감을 약간만 얹어 전시할 뿐입니다. 이것이 다른 위안부 콘텐츠들과 주전장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위안부 콘텐츠들이 불행한 사건에 집중한 뒤 위안부 개개인의 삶-일상성으로 접근하여 공감을 끌어냈다면 주전장은 개인의 의구심을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이슈로 확장합니다. 의구심을 추격하다보니 일본군이 한국인 여성만 위안부 삼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고, 이 이슈가 결론적으로 전쟁 범죄임을 고발하는 층위까지 다가섭니다.
그가 추적하여 보여주는 증거들은, 언뜻 보기에는 결론적으로 둘 다 명료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때때로 번복되고 자주 달라집니다. 피해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증언이 번복된다면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일본 우익들도 이와 뜻을 같이합니다. 그들은 증거라는 것이 위안부 피해 당사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증언뿐이라며, 일본군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위안부는 돈을 받았기 때문에 성노예가 아닌 자발적 매춘부였다고 말합니다. 돈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그들이 때때로 급료와 옷을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이를 빌미로 아베 정부는 1993년에 위안부 이슈를 인정한 ‘고노 담화’를 번복합니다. 증언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기에 피해 입증이 불리한 상황으로 보이지만, 치밀한 객관이 힘을 발합니다.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를 번복하며 ‘증언 외의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정말로’ 증거가 없는지에 의구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격합니다. 그 추격으로 우익의 주장과 달리 일본군 위안부가 받은 급료는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적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위안부 조직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돈이 오갔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들의 주장과 달리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서류는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료들조차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파헤치고 나서는 더 멀리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감독은 “위안부라는 시스템이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그리고 미크로네시아를 포함한 모든 동아시아 국가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위안부 성노예 이슈는 단순히 한국이라는 작은 국가의 뼈아픈 상처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벌어진 일본의 전쟁 범죄입니다. 일본 우익은 군국주의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이 전쟁 범죄를 덮음으로써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밝혀내는 것은 눈물이 아닙니다. 동정이나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도 그것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지만 문제에 본질적으로 다가서는 힘은 발로 뛰는 힘, 추격하는 힘, 객관의 힘입니다. 끊임없이 주시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현상을 관찰하고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포스터의 소녀상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구인가
일본의 우익 인사들은 의외로 순순히 감독의 인터뷰 요청에 응합니다. 그들은 발언하지 않는 것보다 발언하는 것이 더 힘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설득할 자신도 있어 보입니다. 본인들의 논리가 정연하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진영에서 배척하고 원수 삼는 미키 데자키의 인터뷰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고 발언하는 것입니다. 영리하게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위안부 성노예가 없었던 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위안부는 매춘부였으며, 그들이 급여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 가진 골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자마자 반대쪽 진영의 사람들이 나섭니다. 미키 데자키 감독이 서류로써 입증하기 전에 먼저, 반대쪽 진영의 발언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밧줄로 묶어 끌고 가는 것만이 강제-억류가 아니며, 속임으로써 자유의지를 가지게끔 하는 것 또한 강제-억류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일본 우익 측 사람들의 말대로 ‘노예’라는 것이 그저 ‘구속된 몸’의 이미지뿐인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계층 간의 완벽한 지배가 이루어지다면 그것이 억류이며,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이 일본군에 의해 완벽히 지배되었다면 그것은 ‘노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저 ‘노예’라는 하나의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하는 꼬투리 잡기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를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중요합니다. ‘노예’라는 단어 하나를 대상화함으로써 위안부의 성격까지도 바꿔버리려는 그들의 음모를 논파하는 것은 새로운 논리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노예에 대한 사전적 정의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런 은밀한 왜곡에 반박하려면 먼저 그 왜곡을 행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우선 듣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내 손에 가진 것으로 그들을 쳐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정확히 공격할 수 있는 법입니다.
북소리
주전장은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이슈-일본 전범 이슈를 전방위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밸런스를 맞추는 구성-편집의 리듬감 덕분입니다. 대체로 감독이 질문을 던지고, 대립되는 의견을 가진 두 진영의 사람들이 대답하는 모습이 교차로 편집되며 영화는 전개됩니다. 이 속도감 있는 교차편집 덕분에 두 진영의 사람들이 면전에서 마주보고 싸우는 것 같은 긴장감이 생깁니다. 관객은 긴장하며 이 싸움에 집중합니다. 이 긴장감 넘치는 리듬의 근간은 북소리에 있습니다. 이 북소리는 영화 전체의 인상을 결정하는 장치이자 영화가 전개되는 속도입니다. 주전장의 티저에서도, 오프닝에서도, 내용이 전개되는 중에도, 영화가 다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도 관객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북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북소리의 리듬은 마치 출전하는 전사들을 독려하는 듯도 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듯도 한 빠르고 고양되는 리듬입니다. 이런 인상은 ‘주전장’이라는 제목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이런 리듬에 맞추어 사람들이 발언하고 장면이 지나가고 상황이 전개됩니다. 주요한 언어들을 자막으로 띄울 때도(예를 들어, ‘성노예’ 라던지) 이 북소리가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자막들과 함께 관객들의 귀-의식을 사로잡습니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추격한 끝에 얻어진 이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다듬어 관객들 앞에 내놓을지에 대해서, 감독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용의 전개에 소리-속도감을 부여하는 방법론을 선택한 것입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뒤에 남는 것은 어차피 영화 전체의 내용이 아님을 그는 알고서 판을 짰습니다. 북소리를 따라 전개되는 장면 사이사이를 행진하다 보면 그 끝에 무엇이 남는가, 피해 당사자 국가인 한국의 사람들이 ‘담론의 지속’에 만족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출전 북소리와 함께 진실로 다가섭니다. 그 북소리에 실어 묻습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무엇이 보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느끼며, 어느 편에 섭니까? 어느 편에 서서 전쟁을 끝낼 것인가, 어떻게 끝낼 것인가, 당신은 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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