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리사 촐로덴코의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 너, 괜찮은 거니?


*이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존중

 

    지난 8월부터 다시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이번엔 상담이 중심이 아닌약물 치료가 중심이다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시시각각 접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불안이 극에 달한 나머지 공황 장애가 생겼다한밤중에 잠에서  제대로 숨이  쉬어져서였다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점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러다 문득 허벅지의 살을 맨손으로 모두 잡아 뜯어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공황 장애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체감했다강렬한 자학의 충동과 함께 죽을  같은 공포가 손톱 밑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나는 줄곧 살고 싶었다그러지 않았더라면 매일 새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일상을 간신히 유지하며 살아가지도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느라 지친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따위 진작에 그만뒀을지도 모른다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감정을 꾹꾹 눌러 쓰지 않으면  실체를 가늠할  없기 때문이었다그러다 <올리브 키터리지> 보게 되었다퉁명스럽고 거칠지만 누구보다 사람들을 세심히 살피는 올리브그가 통과하는 일상이그를 통과해가는 시간이 밀도 있게 그려진 드라마였다흔한 말로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들 하지만일상을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선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서 더욱 생생하다그리고  거리감은   사람이 살아내는 삶의 무게에 대한 존중처럼 느껴졌다.

 

, 괜찮은 거니?

 

    올리브 키터리지는 헨리 키터리지의 아내이자크리스토퍼 키터리지의 엄마다그녀는 한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평생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살아왔다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다니고부모가 있거나 없고그들 부모가 가진 문제를 보고 자라거나  문제를 해결하기도 답습하기도 하며 살아간다예를 들어케빈 콜슨은 양극성 장애를 겪다가 자살한 어머니의 밑에서 자라 정신과의가 되었다그는 어머니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여성과 교제하며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작은 마을이다 보니 아마 케빈의 어머니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태도도 껄끄러웠을 것이다올리브는 케빈의 학교 선생님이었고, 그의 등하교길을 동반하며 그를 살폈다. - 살핀다고 해서 그를 돌보는 것은 아니고가끔 어머니와 그의 안부를 물었다. - 올리브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꼭 필요한 순간에만 그들에게 묻는다 괜찮은 거니?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녀가 실은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마을에 거의 없을 것이다 독설을 서슴지 않고나머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조금도 봐주지 않으며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헨리를 비난하기 일쑤다아주 신사 납셨네! 하지만 보통의 이들이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상정하기 위해 상대에게 따뜻한 말을 상투적으로 건네는 것과는 달리올리브는 필요한 때에  사람의 인생에 불쑥 들어간다케빈 콜슨잠깐 들어가도 되겠니? 


    뉴욕으로 이사를  케빈이 마을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다그는 뒷자석에 장총을 준비하고 자신이 자라온 바닷가 마을의 일상을 찬찬히 바라본다그리고 그때 올리브 키터리지가 불쑥 나타난다케빈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길 하다가 문득 올리브는 자신의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한  알고 있냐고 케빈에게 묻는다올리브의 질문에 케빈은 흠칫 놀란다그녀는 그때 이미 눈치챘는지도 모른다우연히도 그들이  차의 바로 옆에서  마을 여성이 바닷가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고케빈은 바다로 뛰어들어 그 여성을 구한다올리브는 물에 쫄딱 젖은 그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여기저기 그를 데리고 다닌다마치 그에게 자살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이마치 일상은 이런 것이라고 다시금 일깨워주려는 듯이. 케빈은 결국 자살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은 우연으로 이어지는 듯하지만올리브의 작은 개입이 없었더라면 케빈은 그리 오래 바닷가에 머물지 않았을 테고생을 마감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올리브는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며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서슴없이 다가간다한편날이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가 주위의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그녀야말로 주위의 시선과 생각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아닐까그래서  날이  채로 무심한 자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가장 나약한 자에겐 성큼 다가설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군가 무심히 건넨 말들이 실은 어떤 배려를 내포하고 있는지 안다. ‘괜찮아요?’ 같은 아무렇지 않은 말들이 실은 내가 전혀 괜찮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늘 두 번째인 삶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책에는 케빈 콜슨이 멋쩍은 듯 앉아있던 바에서 공연을 하던 여성 앤지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녀는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왔다. 그에겐 오래된 기혼자 남성 연인이 있다. 번듯한 직업을 가진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는 그에게 있어 첫 번째인 적이 없다. 그렇게 십 년을 넘게 이어온 관계는 서서히 그녀로 하여금 그녀 자신을 가장 우선하여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성매매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내야 한다. 오래 전 헤어진 옛 연인이 그녀가 일하는 바에 찾아왔던 날, 그녀는 더욱 심한 불안에 시달린다. 노골적으로 앤지를 샅샅이 살피는 눈빛에서 그녀는 과거를 본다. 너희 엄마가 찾아왔었어. 알아? 거침없이 단추를 풀기 시작하더군! 그녀는 좀처럼 노래에 집중하지 못한다. 언제나 선의로 가득 찬 헨리 키터리지의 인사에도 쉽게 불안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불안증이 극에 달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아슬아슬하다. 비록 오랫동안 바bar에서 일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그녀의 인생은 점차 알코올 중독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고, 그녀가 가진 관계는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바스라지기 쉽다. 지금까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쉽게 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만큼 쉽게 소비되고, 정작 그녀들이 원하는 신뢰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남성들을, 사회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는 곧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내던지는 일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앤지는 그날 저녁 자신의 삶을 불안한 눈빛으로 되돌아보며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을 결심한다. 자연스럽게 공연을 마치고, bar 옆의 전화기를 빌려 오랜 연인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아내로부터 전화를 건네받은 남자에게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통보한다. 잠시 뒤, 퇴근길을 걸어가던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부차적으로 여기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결정에 남자는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너 미쳤어? 어딜 함부로 전화를 걸어? 고작 그 정도뿐이었던 관계를 다시금 확인하는 앤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고,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지만, 그녀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이 삶을 떠나고 싶지 않아

 

    한편, 어느덧 노년이 된 올리브 곁에 헨리는 없다. 뇌졸중으로 사실상 피아 구분이 어려워진 헨리는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수시로 드나들며 돌보는 일은 올리브의 몫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크게 낙심하여 올리브를 책망한다. 오랜 반려자의 빈자리와 자신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는 아들. 양팔에 의지해 싱크대를 짚고 서있는 올리브의 뒷모습은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로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몇 개월 뒤, 왕래가 끊겼던 아들 크리스토퍼로부터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동안 헨리의 증세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요양병원 간호사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아들 내외를 만나기 위해 올리브는 뉴욕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올리브는 아들이 자신에겐 기별도 없이 재혼을 했다는 것이 영 서운하고 마뜩찮다. 그런 올리브가 편할 리 없는 크리스토퍼와 다시 한 번 크게 싸우게 된 올리브는 결국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게 된다. 올리브는 절대 신발을 벗지 않겠다며 공항 보안 검색대 요원과 입씨름을 한다. 그러나 이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발을 벗게 되고, 터진 스타킹 사이로 맨살이 드러난 발로 묵묵히 걸으며 검색대를 지난다. 아마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올리브는 그저 민폐 할머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건, 시대에 맞춰가지 못해 고집을 부리거나 어줍짢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힘든 여정 끝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헨리의 부고 소식이다.


    올리브는 이후, 곁에 남은 강아지 클랜시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스스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었다기보단 애증하면서도 평생을 부대끼며 함께 살아온 반려인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반려인을 잃고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올리브는 자신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 세상을 아직 떠나고 싶지 않다. 이 드라마의 각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지만, 올리브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시청자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 비평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이제 막 삼십 년을 지난 참이다. 나보다 앞서 결을 쌓아온 이들의 심정에 대해, 그러니까 아직도 세상이 자신을 당혹스럽게 할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넋을 놓는 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존엄을 지키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견디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통감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있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쩌면 영영 가능하지 않을 일일지 모른다. 다만 나는 올리브의 눈을 통해 지켜본다. 거친 해풍에 맞서 처마를 받치고 선 낡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고 바람이 부는 파도의 표면을 지켜보듯이,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다만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켜본다. 나와 다른 삶들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 내게 가능한 일은 겨우 그만큼이 아닐까. 그러다 가끔 묻는 것이다. 괜찮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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