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안드레 외브레달의 <오텁시 오브 제인 도>: 여성이 말하게 하라


사건의 시작

 

  사체가 발견된 것은 지난밤이었다. 마지막 퇴근자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문득 로비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체는 놀라울 만치 깨끗했지만,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곧 경찰이 도착했다. , 누가 사체를 그곳에 두었는지, 어떻게 그가 죽었는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의 집중됐다. 사체는 신원불명이었고, 기이한 것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이 사체의 부검 결과였다. 내상으로만 판단했을 때, 이 사체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어야 했다. 사지는 아무렇게나 절단되어 있었고, 여러 차례 찔린 듯한 자상으로 인해 장기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얼굴은 기묘하게 어그러져 있었는데, 매치되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외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날 회의에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낙태법 개정안과 관련한 회의에서 몇몇 남성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몰지각한 말들이 오갔는데, 사체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됐다. 사체가 발견되던 밤, 회의에 참석했던 남성 국회의원 A씨가 행방불명됐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범인이 그의 의견에 분노한 이들 중 하나일 거라 예상했는데, 알리바이가 의심되는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사체의 부위별로 채집된 흙이 각기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모두 다 다른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21세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마녀의 짓이다. 여성들의 오랜 분노가 마녀라는 이름으로 소환됐다. 경찰은 사체의 신원과 행방불명된 국회의원을 연결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는 데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의문투성이인 이 살인사건을 우선 미제사건으로 일단락 시켰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낙태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사회 주요직의 인사들이 하나둘씩 행방불명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신원불명의 사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인, 지식인들은 점차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언제 타겟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퍼졌으며, 사람들은 되도록 틀린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 이야기는 영화 <제인 도>에 낙태죄를 둘러싼 상황을 연결 지어 상상하고 재구성해본 것이다.

 

제인 도, 신원불명의 사체

 

 영화 <제인 도>는 일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의 지하실에서 의문의 사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견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한 이 사체는 곧바로 부검실로 호송된다. 틸덴 부검소는 아버지 토미와 아들 오스틴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부자는 부검을 진행하며 기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사체는 손목과 발목이 모두 부러져 있었고, 성기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혀가 잘려 있었다. 그러나 심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과 달리 외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부검 도중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다른 사체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부자는 환각에 쫓겨 도망치려 하지만, 외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지 않아 부검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 사인을 밝혀내야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부검을 진행할수록 둘은 점점 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새까맣게 변한 폐,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솟구치는 피, 활발하게 움직이는 신경조직, 위 속에서 발견된 낡은 헝겊 위에 그려진 이상한 그림...

 영화 속에서 드러난 사실들로 추측하건대, 이 신원불명의 젊은 여성은 17세기에 처형당한 마녀, 당시 기독교인들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마녀라 불린 이들은 사실 남편을 잃은 기혼 여성, 젊은 여성들의 임신중절수술을 돕던 산파나 정조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여성 등 남성의 통제에서 벗어났거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자 하고 이를 돕고자 한 여성들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여성들은 마녀로 내몰렸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17세기에 자행된 이 마녀사냥은 일종의 제노사이드다. 기독교 중심의 종교개혁 및 사회 통합을 위한 이념에 근거하여 마녀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시 지식인인 신부, 법관들이었다.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려는 여성들에게 강력한 사회적 통제를 가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마녀는 누구일까?

 

죽음의 원인

 

 영화 속 주인공인 두 남성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사체의 몸을 가르고 갈비뼈를 부수고 두개골을 절단한다. 어째서 부검대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궁금해 하는 아들 오스틴에게 토미는 부검의는 그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인을 밝혀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사인을 밝혀내기 위한 이 행위들은 그녀의 몸에 가해졌던 수많은 폭력과 겹쳐진다. 그녀의 사인死因, 즉 그녀가 왜 죽었는가의 문제는 단순히 자상이 몇 개인지, 신체가 얼마나 훼손되었는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남성은 다시 한 번 여성의 신체를 훼손하며 설명하려 한다. 갈비뼈를 부쉈던 토미의 복부가 퍼렇게 부어오른다. 그는 문득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다. 만약에, 무고한 여성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과정에서 이 존재가 만들어진 거라면? 이건 복수야. 그녀 자신을 위한 의식. 오스틴이 되묻는다. 왜 하필 우리죠? 토미가 대답한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어떻게든 멀리 파묻으려고 애썼을 거라고.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돌아온다. 사람들은 그녀가 겪은 고통을 외면하고자 애썼으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겪은 것과 동일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버지의 손목과 발목이 부러지고, 말뚝이 박힌 것처럼 온몸에 피가 흐른다. 무미건조하게 그녀가 겪었을 일들을 보드에 적어 내려가던 초반부의 모습과 달리 토미는 11초의 고통도 견딜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도 잠시, 오스틴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경찰의 목소리를 듣는다.

 201610,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폴란드 검은 시위에 힘입어 시작된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참가자들이다. 오랜 기간 낙태죄 폐지 시위가 진행되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생산권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단 논의가 고조되면서 드디어 지난해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이 났다. 소식을 들은 여성들은 환호했다. 비로소 여성 또한 동등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10월 정부가 제출한 입법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존치시키는 것과 다름없었고, 여성들은 다시 분노했다. 여성들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행정절차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의사들은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의 건강권을 무시하고 의료행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이후 해당 법안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낙태죄 전면폐지와 관련한 유의미한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며칠 전 한 남성의원은 여성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20-30대 남성들의 의견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요? 남성 의원의 말마따나 남성도 심각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면, 왜 여성에게만 책임이 전가되는 낙태죄 존치가 필요한 것일까?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의 공포 속에 놓여본 적이 없는 자, 피임의 의무를 저버릴 수 있는 자, 임신중지 결정으로 인해 범죄화되는 신체를 가지지 않은 자만이 한가롭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2030 남성들의 의견이 필요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 방기해 온 의무에 대한 것일 것이다.

 

여성이 말하게 하라

 

 태풍으로 통로가 가로막혀 나가지 못했던 오스틴은 자신을 구하러 온 경찰의 목소리에 힘입어 세차게 문을 흔든다. 그러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더 세게 열어봐! 더 세게! 더 세게.. 열린 마음으로 햇빛을 받아들여... 경찰의 목소리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들리던 노랫소리로 뒤바뀐다. 흠칫 놀란 오스틴은 뒷걸음질을 치다 바로 옆에 서있는 아버지의 사체에 놀라 추락사하게 된다. 이후 경찰들은 사건 현장을 수습하게 되는데, 신원미상의 사체가 범상치 않음을 직감한 경찰은 다른 관할로 사체를 호송하게 된다. 그녀의 복수가 끝나는 건 과연 언제일까? 계속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그녀의 사체가 편히 쉴 수 있게 되는 건 언제일까? 왜 여전히 그녀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인 걸까. 마녀사냥을 주제로 한 이 영화가 자아내는 공포와 메시지가 유효한 이유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지금도 여전히 또 다른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서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남성에게 있고, 여성은 죽은 그 몸으로만 말할 수 있다. 죽어야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왜 죽게 되었는지 누구도 대신하여 말할 수 없기에 그녀는 자신을 대신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고 죽게 만든다. 고통도 죽음도 반복된다.

 이 반복을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성을 대신하여 말하는 행위를 멈추는 것이다. 살아있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삶에 대한 선택권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에 대해 태아의 생명권을 인질 삼아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여성의 신체를 재화財貨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질극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우리는 단지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는 것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태어난 이후에 이어지는 을 보장하는 것이 생명권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에서 여성과 태아가 대립되지 않는다. 성별 임금격차, 출산에 의한 경력단절, 사회적 낙인 속에서 홀로 출산을 감내한 여성들의 삶은 경제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이들의 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지 않는 여성이 아니라, 생명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한 인간의 에 필요한 조건들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 현 대한민국 사회다.

 영화의 마지막, 다른 부검소로 호송되는 사체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마치 아직 살아있다는 듯이, 아직 이 세계에 해야 할 복수가 남아 있다는 듯이. 신원미상의 사체, 상처 하나 없이 잔혹한 내상으로 가득한 몸, 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면 마녀라 불리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 여성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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