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 습관이 된 불안
-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 2020. 9. 10. 14:52
*이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안-일기 쓰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자기계발이나 대단한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SNS를 통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말하지 않은 부분이 계속해서 탈락하고, 나아가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점점 더 커지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드소마>를 틀어놓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또한 아무도 없는 집에서 TV를 켜놓곤 했다고 한다. 공백을 채우려는 이 습관이 어떤 정신작용에 의한 것이라면, 왜 <미드소마>인가?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의 습관을 기이하게 여기거나 걱정스러워하거나 재미있어한다. 그들의 반응처럼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영화를 본다. <미드소마>는 공포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관계의 불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겼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습관이 된 불안
대니는 조울증을 앓고 있던 동생으로부터 자살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받는다. 불안에 빠진 대니는 집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지만, 그의 전화는 수신되지 않는다. 죽은 듯이 잠든 부모의 얼굴이 스치고, 대니는 연인 크리스티안에게 전화를 건다. 이 둘의 관계는 그가 겪고 있는 가족 문제만큼이나 이미 오래전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1년 전부터 대니와 헤어질 생각을 해왔지만,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간은 곧 대니에게 언제 관계가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쌓아온 시간이기도 하다. 대니의 불안이 당연함에도 크리스티안은 그의 불안을 예민함으로 치부해버린다. 대니의 불안을 직면하려면 이별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대니로부터 죄책감을 느끼는 크리스티안은 이를 회피하기 위해 대니를 '가스라이팅'한다. 대니는 크리스티안의 자기 투사를 정확히 인지하지만, 그 또한 이별이 두려워 모든 불화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결국, 대니의 동생은 그날 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부모님을 살해하고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은 대니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주지만, 이를 극복할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연인마저 자신을 떠날까 두려운 나머지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버틴다. 대니의 무너짐이 허용된 것은 그날 하루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크리스티안과 그를 붙잡고 오열하는 대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매우 안타까운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대니에게 일어난 끔찍한 비극 때문만이 아니라, 대니가 그 비극을 충분히 견디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관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뒤, 아무렇지 않은 척 파티에 참석한 대니는 크리스티안이 자신에게 비밀로 하고 친구들과 스웨덴 여름 축제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또한 여행에 동참하기로 한다.
연대의 춤
크리스티안의 친구이자 호르가 마을 출신인 펠레의 안내에 따라 마을에 도착한 대니 일행은 이교도적인 마을 공동체의 생활 모습에 넋을 잃는다. 무엇이 섞여 있는지 모를 차를 대접받고, 알 수 없는 벽화가 가득한 방으로 안내받는다. 다양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다른 일행과 달리 대니는 ‘외부인’에서 ‘내부인’으로 이끌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대니에게 안겨 주는 감정은 '소속감'이다. 호르가 마을의 충격적인 세대 의식을 겪고 공황 장애에 시달리는 대니를 달래며 펠레는 말한다. 네가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나도 부모님을 화재에서 잃었어.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이곳에서 새로운 가족을 얻었기 때문이야. 너에게도 그런 가족이 필요해. 자신의 손 위에 살포시 손을 포개는 펠레에게 크리스티안이 볼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펠레는 크리스티안이 그에게 ‘소속감’을 주는지 묻는다. 크리스티안이 널 지지해준다고 느끼니? Do you feel held by him? 대니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머문다. 관계를 통해 기대하는 바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극도의 불안을 겪는 사람이 관계 속에서 제일 먼저 기대하게 되는 것은 나의 불안이 이해 가능한 것으로 지지받음으로써 ‘소속감(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펠레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대니는 조금씩 '연인'에서 '공동체'로 기대를 옮겨가기 시작한다. "5월의 여왕 May Queen"을 뽑는 의식에서 대니는 마을 사람들과 멀어졌다가 다시 붙들리는 춤을 추며 강한 결속력을 느끼게 된다. 떨어져 나갈 듯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손들이 거기 있다. 대니는 그 손들에게 이끌려 마지막까지 춤을 추게 되고, 그렇게 그 해 "5월의 여왕"이 된다.
또 다른 ‘허구’
대니가 호르가 마을 공동체에 흡수되는 동안,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재생산 도구’가 된다. 호르가 마을의 기준으로 임신이 가능한 나이가 된 마야는 묘한 눈빛을 던지며 크리스티안에게 주술을 건다. 남성기의 도구화와 더불어 “5월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주인공 대니의 성장(?) 과정이 언뜻 여성에게 주도권이 주어진 듯 보인다. 그러나 마야를 비롯한 대부분의 구성원이 외부와 내부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부속품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께름칙함이 남는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에 기반하여 생애 주기를 나누고 그에 맞춰 역할을 수행한다. 이 생애주기에 따르면 18년마다 성장하는 세대(봄), 탐험하는 세대(여름), 노동하는 세대(가을), 가르치는 세대(겨울)로 나누어지며, 마지막 주기의 끝에 이른 이들은 “순환”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들의 이름을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준다. 이러한 전통과 더불어 이들 공동체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방식 또한 매우 작위적이다. 마야와 관계 의식을 치르는 크리스티안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대니에게 호르가 마을 여성들이 우르르 달려가 그를 달랜다. 그가 울고 호흡하는 방식에 맞춰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더욱더 크게 오열하는 소리를 내며 대니와 호흡한다. 대니는 그 과정을 통해 그간 억눌린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고 분출하게 된다. 이 과정은 대니에게 있어 가족 관계에서 얻은 트라우마와 연인 크리스티안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오는 상실의 경험을 비로소 애도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호르가 공동체가 과연 대니에게 올바른 안정감을 주는 곳일까. “5월의 여왕”이 된 대니에게 처음으로 부여된 역할은 여름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희생양'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니는 혼자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모습으로 왕좌에 앉혀져 있다. 여왕이시여, 당신의 선택을 겸허히 기다립니다. 크리스티안을 바라보는 대니의 눈빛은 이미 그의 선택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니의 선택도 온전히 그의 선택은 아니다. 호르가 마을 공동체가 짜놓은 각본에 따라 크리스티안은 마야와 관계 의식을 치르고 그 모습을 대니가 목격하는 것까지 계획된 듯하다. 마을 공동체의 거대한 공작 속에 놓인 대니의 운명을 낙관하기 어렵다. 작위적인 관계 맺기를 지향하는 이 마을 공동체가 대니에게 또 다른 '허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니의 행보가 잘못되었다고 쉽게 '평가'할 수 없다. 대니와 호르가 여성들의 오열에 께름칙함과 동시에 감동을 느끼고, 크리스티안에 대한 처분을 선택하는 대니에게 석연치 않음과 동시에 쾌감을 느꼈듯이 이들을 통해 위안을 얻는 대니에게 가짜라고 이야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감정'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왜 그래야만 하는가/했는가
작년 나의 화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면, 올해 나의 화두는 "왜 그래야만 하는가"다. 여러 욕망이 여과 없이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중요한 건, 나는 그리고 다른 이들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자신이 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가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면 내가 왜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발언을 한다면 그 말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위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통해 내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대부분은 그것을 '선의'로 뭉뚱그리길 좋아하는 듯하다. 줄곧 일기를 쓸 때마다 내가 왜 이 영화를 계속해서 보는지 궁금했다. 내가 무엇을 회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영화 <미드소마>는 최근 내가 가진 불안과 가장 유사한 불안을 그린 영화였고,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그러한 불안을 잘 드러낸 영화였다. 불협화음 일색에 시종일관 긴장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불편함이 외려 편안하게 느껴졌던 건 그 때문이었다.
만약 이 영화를 연초부터 이어진 코로나-19 상황을 연계해서 본다면, 종교단체에 의지하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행보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들이 왜 종교단체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그 활동에 의존하게 되는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이 겪는 불안과 상실은 곧 실패를 상징한다. 불안과 상실이 실패로 여겨지지 않고 사회적으로 가시화되는 경우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서일 때 혹은, 권력 계급의 “정치적인 행위” 뿐이다. 누구의 불안이 사회적으로 이해받는가의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당분간 나의 화두는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더 머무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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