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제임스 맨골드의 <처음 만나는 자유>: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 2020. 10. 29. 15:52
우울해본 적 있나요?
몇 년 전부터 나는 빌리 아일리쉬에게 흠뻑 빠져있다. 빌리 아일리쉬는 특유의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가사와 몽환적인 음색으로 큰 인기를 끌어왔다. 지난 7월,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발표했다. 《my future 나의 미래》에서 그녀는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달뜬 목소리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빌리의 음울한 노래들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마음 아파했던 나로서는 그녀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비슷한 시기에 나 또한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환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이다. 내 삶을 이렇게 불안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한 건. 마치 엄격한 종교인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죄로 고백하듯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검열해왔던 것을 이제는 하지 않으려 한다. 문득 오래 전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다 마음을 다치게 된 이들이 나온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울해본 적 있나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움직인다고 느낀 적은?
내가 정말 미쳤는지도 몰라요.(...)아니면 그저 가로막힌 여자아이에 불과한 걸지도.'
무엇과 무엇 사이의 '경계'인가
수잔나 케이슨은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보드카와 함께 아스피린 한 통을 삼켜 자살미수에 그친다. 그녀는 자살하려던 게 아니라고 말했고,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 있는 여성들은 모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그녀는 그곳 사람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으며, 도저히 미친 짓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정상성’을 연기하는 병원 밖 사람들보다 이곳 사람들이 더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수잔나는 상담의의 차트를 훔쳐 읽다가 자신의 병명이 “경계선 인격 장애”라는 걸 알게 된다.
*경계선 인격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선 인격장애는 불안정한 대인관계, 자아, 감정기복 등 장기적이고 비정상적 행동의 패턴을 보이며, 주로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는 인격장애다. 종종 자해 위험을 보이기도 하는데, 환자들은 공허감, 유기공포(fear of abandonment), 해리(dissociation)로 고통받는다. 겉으로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약물 남용, 우울감, 식사 장애는 경계선 인격장애와 함께 발생하는 질병 가운데 하나다. 약 10% 자살률을 보인다고 보고된다. 경계선 인격장애의 원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유전적, 환경적, 사회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Wikipedia) |
수잔나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무엇과 무엇 사이의 경계?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경계를 모르고 자꾸만 내 존재를 침범하는데! 그녀의 말마따나 대체 무엇과 무엇 사이의 “경계”일까. 타자와의 경계?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경계? 불안과 안정 사이의 감정적 균형을 의미하는 걸까? 경계선 인격장애의 회복, 즉 정상적인 상태라 인식되는 경계는 대체 무엇일까. 추측컨대, 이 경계는 증세를 겪는 이들마다 다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렇다면 수잔나에게 있어 경계란 무엇인가. 영화 속 수잔나는 공교육 과정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을 나이다. 그에게 불안정한 경계는 사회와, 사회가 바라보는 나, 그리고 그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사이의 경계가 아닐까.
플로리다, 허황된 자유의 공간
또 다른 인물 리사 로우는 8년 동안 이 병동에 있었던 장기 입원 환자다.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해 병동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환자들은 물론 의료진에게도 거의 가족이나 친구처럼 대한다. 그들이 리사를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수잔나가 입원한 날, 병원을 탈출했던 리사가 다시 잡혀 들어온다. 이 모습을 본 수잔나의 룸메이트는 불안에 떨고, 내가 그리웠냐는 리사의 질문에 어떤 이는 별로 그립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리사의 진단명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차트에 적힌 증상에 따르면 조울이 심하며 다른 환자들을 통제하고자 한다고 쓰여 있다. 리사는 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 할까. 영화 내내 그 누구도 리사를 찾아오지 않는다. 리사에게 가족이자 친구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환자들과 자신을 환자로 대하는 의료진뿐이다. 리사가 처한 환경에서는 수평적인 관계, 지속적인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다른 환자들(자신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통제 욕구를 표출하거나, 일탈 행위를 자유라 생각하고 반항심을 드러내며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보다 더 불안정한 존재를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병원의 시스템 안에서 환자로 위치되는 한 그의 저항은 단순한 병적 증세로 치부된다는 점이다. 그는 계속해서 병원을 탈출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며 환자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한다. 어느 날은 TV를 보다가 플로리다의 디즈니랜드에서 신데렐라 역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른 환자에게는 미키 마우스를 하라며 그러면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않겠냐고 빈정댄다. 하지만 정작 동화 같은 세계에서 사랑받고 싶었던 건 그녀가 아닐까. 그녀가 만약 디즈니랜드에서 신데렐라가 되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사랑받는다면, 그건 그가 ‘리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데렐라’라는 캐릭터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 누가 있던, 그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그게 정말 리사가 원하는 방식일까. 그렇게라도 사람들로부터 환대받고 싶은 리사의 욕망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수잔나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었다. 그때의 난 리사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그저 배우의 연기가 매력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왜 지금은 리사가 더 눈에 들어오는 걸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
수잔나는 약 1년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다.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좀더 빠르게 인지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잔나의 부모는 그녀의 감수성에는 무지했을지언정 그녀를 돌볼 수 있는 재력과 사회적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에 대한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리사의 경우는 다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들이 있는 병원은 각각의 환자에게 비용을 차등 적용한다고 한다. -“병원비가 차등이라서 좋아. 이런 금고털이범하고도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라는 대사에서 추측한 것이다. 환자의 경제 수준에 따라 비용이 차등 적용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1960년대 미국 사회는 현재 미국과 한국의 복지 수준보다 좋았던 것 같다.- 보호자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리사가 좋은 시설을 갖춘 병동에 오래 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병원을 탈출한 뒤 돈이 없어 길거리에서 성매매를 했다고 리사는 말한다. 그녀에겐 병원 이외에 돌아갈 곳은 없다.
앞으로 이어질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관계'나 '공간'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건강해질 수 있을까? 병동을 떠나는 수잔나에게 리사는 묻는다. 왜 아무도 자신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느냐고. 이 물음은 관계에 대한 욕구를 통제로밖에 표출할 수 없게 된 물음이다. 수잔나는 끝내 그 물음에 답한다. “너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방치한 나머지 너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죽어있다고. 이 가장 솔직하면서도 아픈 진실 앞에 리사는 비로소 무너진다. 자신을 뒤로한 채 떠나는 수잔나에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원작 에세이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실제 리사와 수잔나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병원 밖에서 재회한다.
첫 문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빌리 아일리쉬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거나 자신의 곁을 굳건히 지켜준 원가족이 없었더라면, 자기 자신을 다시 사랑하고 미래에 대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을까. 만약 같은 자리를 배회하며 불안을 거듭하던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내가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었던 ‘환경’ 속에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개개인이 가진 자원의 불평등은 구조의 문제이고, 구조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로에게 용기가 된다는 것은, 또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 구조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지, 나아가 이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를 함께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회. BBC 드라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를 마주하라 (0) | 2021.01.07 |
---|---|
14회. 안드레 외브레달의 <오텁시 오브 제인 도>: 여성이 말하게 하라 (0) | 2020.12.17 |
12회. 리사 촐로덴코의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 너, 괜찮은 거니? (0) | 2020.10.08 |
11회.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 습관이 된 불안 (0) | 2020.09.10 |
10회. 봉준호의 <기생충>: 한국 (남성)영화라는 장르의 반복 (2) | 202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