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BBC 드라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를 마주하라
- 내가 사랑한 영화들: 은수(연재 종료)
- 2021. 1. 7. 09:14
Illustration ⓒ 은수
스스로의 눈을 가린 욕망
연말연시를 앞두고 박원순 전 시장(이하 박 시장) 성폭력 사건에 대한 새로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 시장의 자살 당시 언론이 가장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누가 박 시장에게 알렸는가 하는 문제였다. 피소인의 죽음으로 인해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되는 것은 이미 예정된 바였고,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위치에 있는 서울시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진상조사다. 피해자는 과거에도 거듭 인사담당자 등을 통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서울시가 공표했던 성인권 기본 조례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피해자의 고충은 번번이 묵살해왔다. 피해자가 궁극적으로 택한 방법은 법률적 해결이 되었고, 그마저도 피소인의 자살로 인해 ‘묵살’되었다.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에 간과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폭력 가해자 1인의 독단적인 범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범행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집단 내부의 문화,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인식을 포함한 다양한 협조 관계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소인의 죽음 이후 다른 성폭력 사건과 달리 박 시장 성폭력 사건은 이 문화와 구조, 환경, 인식에 대한 고발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공범이나 다름없는 행위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조화를 보냈던 대통령, 뒤이은 진보 인사의 죽음은 여권계 인사들을 비롯한 지지자들에게 또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가해자 박원순을 뛰어난 인권 운동가이자 정치인, 행정가로 박제하기 위해 기록을 편집하고 정치적 애도에 열을 올렸다. 서울시는 공대위를 만들어 진상 규명에 힘쓰겠다 공표했지만, 이후 그들이 힘쓴 부분은 피해자 프레임 밖으로 피해자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가해자 한 사람의 진위 여부를 밝혀내는 일보다 집단의 성폭력 문화를 밝혀내는 일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판의 대상이 개인이 아닌 집단이 될 때, 거기에 얽힌 이해관계는 보다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욕망이 거기에 얽혀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전명작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각색한 BBC 3부작 드라마 시리즈는 고립된 공간에서 차례차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미스터리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눈을 가리고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상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유로 기소되었습니다
열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내용의 편지를 받고 병정섬에 초대된다. 이들을 초대한 이는 오웬 부부로, 초대된 이들 중 누구도 부부를 직접 만나거나 알지 못하지만 편지의 내용에 매혹되어 찾아왔다. 편지의 내용은 이들의 흥미를 돋울 만한 이야기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윌리엄 헨리 블로어의 경우 그의 지인으로부터 자주 전해 들었다며 경찰로서 뛰어난 감각을 가진 당신이 병점섬에 초대된 이들을 관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맞춤형으로 작성된 초대장의 내용들로 보아, 초대받은 이들과 달리 오웬 부부는 이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와 교류해왔는지, 심지어는 내밀한 욕망까지도. 그 때문인지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이 부부의 초대장에 별 다른 의심 없이 응하게 된다. 병정섬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하는 관리인 로저스 부부도 자신을 고용한 이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미리 지시된 내용에 따라 움직일 뿐 오웬 부부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질문에 자신 또한 본 적이 없다고 답한다.
호화로운 만찬이 끝난 뒤, 오웬 부부에 대한 궁금증이 인 이들은 각각 편지에 쓰인 내용들로 각자가 알고 있는 오웬 부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들이 살인죄로 기소되었다는 방송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저택을 헤맨다. 그러다 텅 빈 방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턴테이블을 마주하고 당황하게 된다. 대체 오웬 부부는 누구란 말인가? 어떻게 자신들이 감추고자 애썼던 죄를 모두 다 알고 있는가? 응접실에 다시 모인 이들은 앞서 거론된 죄목과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롬바드를 제외한 이들은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자신도 어찌할 도리 없이 벌어진 사고에 불과하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실제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다. 마치 그건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이들이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본모습,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려 한다. 존경받는 의사, 위대한 전쟁 영웅, 시민들을 지키는 경찰, 희생정신이 뛰어난 가정교사, 엄격한 도덕군자, 정의의 수호자... 이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은 죄를 저지르기 전의 모습으로 편집되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와 삶이 모두 부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 기억 속에서 피해자들은 ‘불의의 사고에 의해’ 죽은 이들로 각색되어 그들의 삶 속에서 지워진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욕망
아홉 명의 인물들이 모두 죽고, 이제 남은 것은 클레이손뿐이다. 그가 범인인 걸까? 혼란에 빠진 클레이손은 자신이 죽인 아이, 시릴의 환각을 본다. 시릴은 환한 미소로 계단참에서 그녀를 맞이한다. 클레이손은 비로소 지금까지 부인해왔던 자신의 범행 기억과 마주하게 되고, 그녀가 아이를 죽음에 내몰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클레이손은 천장 갈고리에 교수대처럼 걸려있는 밧줄에 몸을 이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진범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죽은 줄 알았던 이들 중 하나로, 살해현장을 위조하여 용의선 상에서 비껴갔던 인물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던 그녀는 일순 당황하여 의자를 걷어차게 되고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딘 채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범인은 그녀가 딛고 서있던 의자를 걷어찬다. 실제 기억과 마주하고 생의 의지를 잃었던 클레이손은 왜 다시 살려달라고 외쳤을까. 클레이손은 모두가 죽고 더 이상 자신의 비밀을 감춰야 할 타자가 없자, 자신을 오롯이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다시 그녀 앞에 ‘타자’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고 죄책감에 짓눌려 삶의 의지를 잃었다가, ‘타자’가 나타나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이 다시금 발현된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타자의 시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건 그렇지 않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욕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 양상은 얼마나 다양할까? 자신이 가진 욕망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나와 집단,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 속에서 발현되는 나의 모습, 나의 말들 속에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 욕망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는다면, 결국 욕망에 삶이 이끌려 다니게 되고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욕망이 말하고 행동하게 할 것이다. 문제는 이 욕망이 전면적으로 나서서 말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가린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새해에 밝혀진 뉴스에 따르면, 여성단체연합은 가해자 박원순에 대한 고소사실은 피해자의 변호사와 박원순 성폭력 사건 공대위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연합 대표는 이 사실을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전달하였고 젠더특보는 가해자 박원순에게 이 사실을 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찰이 청와대에 이 사실을 전했다. 여성단체연합은 가해자 박원순에 의한 피해자에 대해 ‘피해자’라고 부를 것인지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를 것인지를 두고, 피해자성을 희석하는 단어인 ‘피해 호소인’이라는 호칭을 채택하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난 대화 내용이 공개됐다. 여성인권을 위해 힘써 왔던 이들은 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가해자 박원순이 자살했을 때에도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던 질문이었다. 피소인이 사망에 이를 경우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될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됨으로써 박원순 시장에 의한 가해 사실은 조사가 어려워졌으며, 그로 인해 가해-피해의 구도를 희석시키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이전에 자신들이 인권을 앞장서서 보호하고 반성하기 위해 마련했던 당규를 날치기로 뒤집어 주요 도시 2곳의 시장 재보궐선거에 후보를 내는 내용으로 당규를 변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야당 의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집권 여당이라는 권력에 기대어 비판의 목소리 위에 가뿐히 눌러 앉는다. 그전까지 행해졌던 서울시의 인권행정은 가해자 박원순이 소속된 집권 여당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이고, 현재 집권 여당인 민주당과 인권행정도시 서울시의 이미지가 박원순이 가해자가 되느냐 인권행정가로 남느냐에 달려 있다.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성폭력 가해자를 ‘인권행정가’로만 기억하려는 이들의 안하무인 식의 태도는 이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은 가해자인 박원순과 서울시, 나아가 그 권력이 귀속된 집권 여당과 정부, 권력과 성폭력의 관계 속에 있다. 가해가 있은 뒤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야기가 흘러간 궤적 속에 있던 이들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선택을 내리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들로 하여금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그들은 위치와 목적을 잊고 그 가치를 기꺼이 저버리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욕망은 동인動因에 불과하다. ‘행동’하고자 했던 이전의 목적은 권력을 수호하고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병정섬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난 미스테리한 살인사건의 범인은 평생을 법의 수호와 정의,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껏 정의의 심판자라고 생각해왔던 자신의 삶이 실은 자신이 집행해온 살인자들의 욕망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에 다다르자, 자신의 욕망을 반성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그 욕망을 수행하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살인을 목적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자기 합리화의 규칙에 따라 피해자를 선별하여 최상의 쾌락을 누리기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범인을 포함한 이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 이후 그전까지의 삶을 돌아보기보단 욕망하는 삶을 선택한 이들이다. 범인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대한 완전범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결국 이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서울시 비서관 민경국과 경희대 김민웅 교수는 최근 피해자의 편지를 게시하여 피해의 진위여부를 흐리고 가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미 이전부터 서울시 관계자들은 2차 가해자라기보단 공범에 부합하는 행위들을 자행해왔고, 현 정권의 지지자들도 그에 따라 ‘진정한 피해자’ 프레임 속에서 무분별하게 2차 가해에 동참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단체의 고소사실 유출이 밝혀지자, 이들은 태도를 바꾸고 여성단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성단체의 고소사실 유출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나, 이 모든 문제의 초점이 여성단체의 과실로만 대두되는 것은 이로 인해 안전하게 침묵할 수 있게 된 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려주는 가림막 역할을 한다. 피해자의 변호인에 대한 행적을 캐묻거나 인신공격을 한 이들은 현재 여성단체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형성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 그들의 가진 욕망이 관계 맺는 방식은 성폭력 문화와 구조를 존치시킴으로써 소속집단의 권력을 보호하는 데에만 있다. 여상단체의 과실을 비난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힘든 싸움을 이어가며 살아있는 피해 당사자가 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이들과 단체가 있다. 이들 또한 여성 활동가이고, 여성단체이다. ‘말할 수 있는 힘’ 그리고 ‘듣게 하는 힘’을 가지고자 했던 목적을 잊지 않은 사람들만이 피해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시작으로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폭력 사건, 박원순 성폭력 사건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중심이 된 진보 진영은 다시금 자신들의 욕망을 돌아봐야 하는 시점을 훨씬 지났다. 그럴듯한 언사를 펼치며 중요한 시기에 조용히 뒤로 숨는 현 정권, 그들이 ‘소유해 온’ 인권의 가치는 집권 여당의 지난 행보에서 이미 그 바닥을 보았다. 이제는 반성을 요구하기보다 그 죗값을 치르라 말하고 싶다.
어제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여성단체연합 내부 대화내용 공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연락을 했고 그 사실을 물었으나 유출은 하지 않았고, 피소 이전이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없다는 게 입장이었다. 심지어는 그 사실을 가해자에게 전한 젠더특보 또한 피소 이전 시점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유출’은 바로 피소 이전이기 때문에 문제되는 지점이다. 준거집단의 권력에 귀속하는 그의 발언은 지금까지 성폭력을 반대하고 성폭력 문화를 타파하고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권력에 대항하는 여성운동의 정신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며칠간의 침묵 속에 그가 셈한 것들 사이에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성운동가로서의 정신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배신감과 허망함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박원순의 인권활동을 지지했지만 박원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원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서명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이들은 ‘박원순’으로 대변되는 가치가 아닌, 그들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인권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권의 역사, 운동의 역사는 어느 집단, 누구 한 사람의 얼굴로 대변되지 않는다. 목적을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가치를 지켜나가고 그것을 실현해나갈 때, 이 삶의 조각들이 모여 역사는 다시 쓰여지고 역사로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지금, 우리가 피해자 곁에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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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한 영화들>은 이번 회차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근 시일 내에 다른 글로 만나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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