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노동’에 맞서 싸우는 여자들 : 『회사가 사라졌다』 리뷰 / by 희음
- 모두의 리뷰
- 2020. 12. 22. 12:22
영국드라마 <킬링 이브 시즌2>에는 주인공 킬러인 빌라넬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한 여성 킬러가 등장한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그는 ‘깨끗하고 윤리적인’ 그만의 방식을 사용할 뿐 아니라 늘 투명하게, 소리 없이 움직인다. 여기서 투명과 적막의 핵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그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배경처럼 그곳에 있기다.
영화의 이런 내레이션에 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다름 아닌 여성 청소노동자다. 철벽같은 보안이 구비된 기업체라 해도, 비슷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청소노동자를 진짜, 가짜로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가려내거나 신경 쓰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침묵하며, 자세를 낮춰 걷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그들이 투명하고 적막한 존재가 된 것, 혹은 되기로 한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내몰아온 ‘어쩔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요구와 억압 때문인가.
『회사가 사라졌다』를 펼친 후 가장 먼저 눈에 든 대목이 이 ‘어쩔 수 없음’이었다. 싸움을 이어온 여성노동자들의 오랜 한숨이 여기서 이미 다 드러나 보였다. 한 회사가 폐업한 것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입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그 입들 앞에서 설명을 해야 했던 시간은 또 얼마나 지리멸렬했을까. 또한 그러한 설명은 분명 이들이 당해온 부당한 일과 그에 맞선 운동을 지속하면서 깨우친 ‘생각’을 담고 있었을 것인데도, 언론은 이들의 생각을 알리기보다는 이들의 ‘어떤 감정’만을 매끈하게 추려내 보도하곤 했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의 작업이 훌륭한 것은 싸움의 다양한 과정들 속에서 이들 여성노동자가 얻게 된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 적고 있다는 점일 테다. ‘회사의 폐업이라는 불운한 상황에서 답 없는 싸움을 지속하는 불쌍한 사람’의 전형을 획일적으로 그리거나, 그 어두운 심정만을 나열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책 안에는 싸움을 통해 난생처음으로 ‘자기 시간’을 갖게 된 사람이 있었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글을 써달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또록 팀이 그들의 바람을 잘 받아 안았고 또 성실히 옮겨 적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나조차 언젠가 어딘가에 몸담고 일하다 이런 일을 당한다면, 회사를 향해, 국가를 향해 무엇을 어떻게 따져 물어야 할지, 그 이후 싸움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나가야 할지를 책을 통해 가늠하게 되었을 정도니까.
우선 크게는 이것이 국가를 상대로 질문하고 요구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고용창출을 촉진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사실상은 기업만을 보호하고 육성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린 이 나라 법이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 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자본가의 배가 충분히 부풀어 오르면 그다음엔 손쉬운 폐업으로 넘어가도 좋다는 승인이라도 하는 듯 보이는 자본가 중심의 법안 말이다.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쉴 새 없이 갈아 넣은 결과로써 두둑해진 자신의 배를 갈라 부동산 투기 및 골프장과 레저시설 건립에 모조리 쏟아 붓는다 해도 이를 제지할 법 조항은 없다.
신영프레지션과 레이테크코리아의 경우, 대통령 표창, 남녀고용평등우수기업 상 수상을 통해, 혹은 고용창출 우수기업으로 선정됨으로써, 기업의 경제적 이익으로 즉각 이어지고도 남을, 유무형의 혜택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이 기업들은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마자 눈앞에서 보란 듯 폐업을 감행했다. 합법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이 기업에 설립 초창기부터 지원되어온 막대한 국가적 지원 비용에 대해서는 기업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지원 자금은 결국 국민의 세금일 텐데, 그 세금이 허투루 쓰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같은 ‘기획 폐업’을 두고 우리가 계속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한다면, 우리의 세금이 여성노동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쫓아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 쓰이는 것에, 우리 역시 동조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들은 한 회사에 10년, 20년을 몸담았고 회사가 시키는 온갖 잔업과 야근에도 다만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른 동료 노동자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도 군말 없이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똑같은 일에 대해 여성노동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남성노동자들조차 근무조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일터였음에도, 그들만은 충성했다. 충성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침묵해야 했고, 자세를 낮추어야 했고, 사용자에게 위협적이지 않아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청소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일의 성격은 다른데 비슷한 취급을 받고 비슷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건 이들이 단지 ‘여성’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이 그림자노동이라면 이들의 노동은 투명노동에 가깝다. “1000원짜리” 노동이라 불려도 되는 노동. 지근거리에서 “더럽다”라는 말을 내뱉는 사용자 앞에서도 멈추지 않아야 하는 노동. 언제나 가사노동과 병행되며 언제든 그만두고 가사노동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임시’ 노동. 상해의 위험 속에서도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은 채, 10년, 20년 장기근속을 해가며 기존 작업량의 두 배를 해낸다 해도 만년 ‘비숙련노동’으로 치부되는 노동.
물론 이들은 그런 대우 속에서도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중식수당이 삭감되고, 연차가 사라지며, 새로운 계약서 앞에 호출당하는 일 앞에서까지 자부심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는 것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고, 자세를 곧추세웠고, 한동안이나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배경이 아닌,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그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부당함마저 지나치며 살았는데, 해고와 폐업에 맞서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마치 ‘출세’한 것만 같다는 고백이 나오기도 했다. 이순 씨 이야기다. 그는 생계 걱정이 없는 편이었지만 함께 싸웠다. 싸우는 과정을 함께 지나며, 지금껏 해석할 틈도 없이 지나가게 내버려둔 자신의 삶을 객관의 눈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고생한 시절에 ‘갑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게 되었다.
레이테크에서 일한 해선 씨의 이야기에도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이 싸움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준 게 무엇이었냐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팀장님들이 누구누구 씨라고 안 부르고, 가끔 이름만 부를 때가 있거든요. ‘해선아’ 하고 부를 때가 있어요. (···) 그때 너무 좋았어요.” 기록자인 희정은 해선 씨와의 대화를 가장 울림이 컸던 장면으로 꼽으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관계, 공간, 일상이 어떻게 싸움의 ‘현장’으로 옮겨 가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아니면 해선 씨가 레이테크에서 맺은 관계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알았기 때문일 거라고. 비슷한 말이겠지만, 해선 씨의 싸움의 동력은 결국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한 관계 안의 믿음과 지지로부터도 기인한다는 것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건 동일한 장면을 두고 기록자 림보는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니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동생은 그 언니를 따르며 깊어지는 ‘가족 같은’ 살뜰함에는 나이 위계가 스며 있다는 해석. 그러므로 이는 평등한 관계라 하기 어려우며, 가족주의 혹은 친밀한 가족관계에 대한 믿음이 기업 안에 침투한 것이라는 지적. 이때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기업에 종속시킴으로써 이윤 확대를 돕는 교묘한 기술이 된다.
이 두 기록자의 맞고 틀림을 측정하는 일에 공을 들일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선 희정의 감각과 림보의 비평 모두에 끄덕여지기도 해서다. 다만 하나의 장면을 다르게 읽어내는 기록자들의 시선과 독해를 온전히 담은 두 사람의 글쓰기 역시 이 책의 장점으로 느껴졌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것은 각기 다르게 경험해온 시간에 대한 존중이며, 각자가 서있는 위치의 다름을 존중한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기록자들이, 동일하지도 균질적이지도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과 생각에 대해서도 이를 인위적으로 획일화하는 일 없이, 그 다양함 그대로,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 각자가 찍는 경험의 방점을 오롯이 살려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으리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경험이 다르고, 경험에 대한 각자의 해석 또한 달라도 그들 모두가 "그래도 되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쉽지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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