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레볼루션(feat.사만보) : 『객체들의 민주주의』 서평 / by 손보미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 회원)


 

     이 책의 목적은 존재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의미심장하고 파격적인 캐스팅을 감행하는데, 새로운 존재론인 존재자론을 연출하며 그 주인공으로 바로 ‘객체’를 섭외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책의 본래 목적이 진실 찾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저자의 캐스팅은 파격적인 동시에 무척 영리한 것이기도 하다. ‘객체’는 그동안 수많은 철학책 속에서 가장 왜곡되고 은폐되고 또 소외된 존재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진실을 밝혀냈듯이 이 책의 저자 레비 R. 브라이언트는 ‘객체’를 통해 그동안 가려졌던 존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존재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브라이언트는 또 하나의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데 바로 우리의 주인공 객체를 주체 없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주체 없는 객체라니. 이는 마치 오른쪽 없는 왼쪽 혹은 남자 없는 여자 또는 어른 없는 아이를 생각해 보자는 것처럼, 얼핏 들으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제안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 이대로 그냥 책을 덮어버릴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존재를 다시 생각하기라는 이 책의 목적은 그저 흥미로운 사유 실험의 하나가 아니라 심각한 기후변화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팬데믹 위기 속에서 긴급하게 제기된 중요한 존재론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주체 없는” 객체를 생각하라는 저자의 제안을 잘 받아들이려면 이“주체”가 어떤 주체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저자가 빼자고 말하는 주체는 바로 철학에서, 특히 17세기 이후 맹위를 떨치며 점차 모든 철학적 논의를 교착상태에 빠트려버린 “인식 주체”다. 인식 주체는 객체를 “응시 대상, 표상의 대상 혹은 문학적 담론의 대상”들로 격하시키는데 이로 인해 객체는 주체 없이는 그 기반조차 모호한 힘 빠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인식 주체의 등장은 우리가 객체를 오직 주체 앞에서 대립하는 하나의 극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객체라 불리는 수많은 존재는 그것들을 인식해주는 주체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이 인식 주체라는 것이 초래하는 무시무시함은 바로 다음에 드러나는데, 우리가 엄연히 존재함을 느끼는 객체에 관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이 질문이 순식간에 객체가 아닌 인식의 문제로 뒤바뀌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식 주체의 맹위 속에서 “저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곧장 “저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로 뒤바뀌고, 뒤바뀐 질문은 객체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것을 넘어 주체 자신마저 ‘인식’이라는 장벽 안에 가둬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의 장벽에 갇힌 주체는 오로지 인식의 문제에만 골몰하며 정작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무지와 무능 속에서 죽어간다. 
  객체를 억압하며 동시에 앎을 차단당한 채 죽어가는 주체의 모습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다. 수많은 존재 중 자신만이 인식하는 주체라 선언하며 우쭐대다가 어느새 무지와 무능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의 망상적 꿈들이 있다. 먼저 파괴된 세계를 뒤로하고 다른 우주로의 진출을 꾀하는 야심찬 모험가의 꿈이 있다. 그리고 대지와 바다의 무궁한 치유 능력을 찬양하며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비겁자의 꿈이 있다. 끝으로 파괴적인 자기 모습에 몸서리치며 세계를 위해 인간 자살 프로젝트를 도모하는 허무주의자의 꿈이 있다. 이 꿈들은 각기 다른 외양을 띠고 있지만, 늪에 빠진 인식 주체의 망상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꿈의 다른 버전들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꿈들은 우리가 당면한 생태계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위기를 더 심화시킬 위험천만한 꿈들이라는 사실이다. 
  인식 주체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재론에 관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은 곧 저 파국적인 꿈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평평한 존재론이라 불리는 브라이언트의 존재자론은 인식 주체의 망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를 타개해 가는 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이 관점을 잘 맛보기 위해 저자의 말을 좀 더 따라 가보자. 주체를 뺀 객체를 강조하며 저자가 요청하는 바는 이제는 주체보다 객체에 주목하라거나 혹은 객체의 편에서 주체를 격하시키라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존재론인 존재자론이 실로 요청하는 바는 오히려 이제는 주체를 “다양한 객체 중 하나의 객체로 전환”하면서 “그것이 철학과 존재론 안에서 차지하는 특권적이고 중심적이며 토대적인 지위”, 결국 주체의 숨통까지 막아버린 그 지위를 약화하고 다양한 객체, 즉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가 독자적인 자율적 행위자로서” 세계 속에 풀려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구절은 주체를 객체로 전환하라는 것인데 저자는 주체란 사실 “특정한 종류들의 객체”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객체의 해방을 위해 주체를 혐오하거나 파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반드시 부숴버려야 할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인위적으로 세워진 ‘인식’이라는 장벽이다. 
  장벽 허물기는 무엇보다 인식 주체의 마수에 붙들려 있던 모든 객체가 자율적 행위자로 풀려날 때 가능하다. 더불어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가둔 장벽을 알아채고 객체로서 자신의 자율적 힘을 되살릴 때야 비로소 이 혁명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 세워진 벽을 허물고 모두 동등한 실체성을 지닌 객체로서 서로를 마주할 때 우리는 망상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모든 존재자가 생성의 즐거움을 일깨워줄 교차하는 인식 속에서 잠재된 역량을 아름답게 펼치며 세계를 바꿀 수 있다. 
  혁명의 주역들은 자신의 해방을 통해 세계를 바꾼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더는 인간이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듯이, 브라이언트는 객체 혁명을 통해 더는 존재가 주체와 객체로 나뉘지 않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그려간다. 형이상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가 생태계의 위기, 우리 삶의 위기와 분명히 이어지고 있는 지금, 브라이언트의 새로운 존재론인 존재자론은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지금 철학에 꼭 필요한 긴급조치다. 『객체들의 민주주의 』는 철학의 역량, 즉 앎을 사랑하는 역량을 되살리기 위해 이 긴급조치를 실행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책에서 제시된 존재자론을 진정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한때 인터넷에서 ‘아만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의 줄임말로 그 출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유명한 책이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 1권에 등장한 말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인터넷 세계로까지 이어져 줄임말로 유행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이 말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스며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이 사회의 곳곳에 스며 어떤 지침을 내리는 금언처럼 작동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수많은 존재 중 인간만을 특별히 인식하는 주체로 여기는 우리의 사유 습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아만보’라는 말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며 이를 검증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브라이언트의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을 검증하면서 나도 모르게 또다시 인식 주체의 덫에 걸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덫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도대체 안다는 게 뭐지?’ 이 질문은 브라이언트가 경고하듯 새로운 앎을 길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진실과 한층 멀어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사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이 짧은 경구는 유통되며 앞뒤가 잘려나간 것이었다. 그 원문을 다시 들춰보면 우리가 이 경구를 효과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에 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우리는 ‘아만보’를 향해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했다. 브라이언트가 책,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철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중심에 세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주체는 너무나 비대해져서 객체를 억압하고 동시에 자신의 숨통도 막아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밀실에 갇힌 주체들은 환각에 빠져 ‘아만보’라는 독백만 주문처럼 외고 있었다. 브라이언트는 이 밀실의 벽을 허문다. 물론 객체들을 통해 객체들의 힘으로.
  억눌렸던 힘을 되찾으며 일어나는 객체들이 하나둘 늘어나면 그만큼 벽이 허물어지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러다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벽은 결코 다시는 복구될 수 없게 무너져 내린다. 따스한 태양과 시원한 바람 아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모두 객체들이다. 그리고 이 객체들은 곧이어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자율적인 존재자들이다. 존재자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른다. 

  사만보-사랑하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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