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투쟁』 서평 / by 박이은실

“여성, 임금노예의 노예에서 자연의 동지로 옆에 서다”


    18세기 이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인권과 기회의 평등을 주장해왔고,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성차별 체계를 분석하고 비판해왔으며, 사회적 조건과 조응해 구축되는 정신구조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특정 심리와 욕망이 낳는 여성혐오를 분석해왔고, 문화 문제만큼 경제 문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고용, 임금, 성별화된 분업 및 차별 등에 주목하여 여성이 처한 부당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싸워왔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가 무엇보다 ‘가사 노동’이라는 성별화된 노동에 주목하고 ‘임금’ 요구를 통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자신의 싸움을 성별노동분업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선집 <페미니즘의 투쟁>을 보면 달라 코스따가 1970년대부터 해왔던 지난 50년간의 지난한 정치적 투쟁은 가사노동에서부터 임신중절, 여성 동성애, 성매매, 낙태, 비혼모, 이혼, 섹슈얼리티, 이주, 선주민의 땅에 대한 권리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여러 다양하고 중요한 사안들에 개입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글은 어느 하나 구체적이지 않거나 생생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는 그녀가 각 사안들이 어떻게 다른 사안들과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얼마만큼 깊이, 그리고 샅샅이 살피고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 페미니즘 제2물결의 등장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해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동안 당대 부상했던 주요 사회적 문제들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대응했던 데다가, 핵심 문제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사유를 펼치고 실천현장을 직간접적으로 방문해 만든 결과물일 것이다. 나는 매 장마다 다양한 사안에 대해 그녀가 보여주는 성실함, 진지함, 솔직함, 그리고 농도 짙은 진정성뿐만 아니라 예리한 분석에 깜짝깜짝 놀랐다. 여성학을 하는 학자로서 나도 그동안 페미니즘 이론서와 에세이들을 어지간히 읽어왔지만 이 책의 달라 코스따같이 역사적, 지구적, 이론적, 대안적 관점을 일거에 갖도록 도와주는 분석을 제시하고 대안 제시를 위해 애쓰며 가슴을 뜨겁게 했던 이도 드물었다.

    달라 코스따는 무엇보다 ‘생산자(노동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읽는다. ‘여성’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임금노동체제에서 여성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는지, 즉 노동하는지 주목하였고, 오직 여성에게만 할당된 비임금노동인 ‘가사노동’에 주목했다. 그녀의 대표 업적 중 하나인 가사노동 분석은 매우 강력한 문장들로 제시되고 있다.

    “여성은 임금노예의 노예이며, 여성의 노예 상태가 남성의 노예 상태를 보장한다.” (46쪽)

    “여성의 노동은 자본주의 축적의 드러나지 않은 측면을 구성하며, 자본에게 가장 귀중한 상품, 즉 노동력 자체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자본에게 꼭 필요하다. (...) 계급 개념이 확장되면서 주부가 포함되었다. 주부는 노동자주의적인 접근법에 따라 가사노동자라고 불렀는데, 이런 용어 사용은 사실상 시장이 하나의 임금으로 두 명의 피고용인, 즉 노동자와 그 노동자 뒤에 있는 주부를 부린다는 점을 꼬집었다.” (169쪽)

    “우리는 (...) 주부를 여성 역할의 중심인물로 두려고 한다. 또, 모든 여성, 심지어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까지도 주부라고 상정한다. 어디에 살든 어느 계급에 해당하든, 세계 어디서나 여성의 위치는 가사노동이 가진 독특한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26쪽)

    “우리는 모두 가사노동을 합니다. 가사노동은 모든 여성의 유일한 공통점이며, 우리가 우리의 힘, 즉 수백만 여성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 개혁가들(이) (...) 한 번도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가사노동이 우리 모두가 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59쪽)

    “맑스 이래로 자본이 임금을 통해서 지배하고 성장한다는 사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임금 노동자와 그들을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일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노동 계급 조직들이 분명히 밝히지도 않고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은, 바로 이 임금을 통해서 임금 없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조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 착취는 임금이 없다는 점이 착취를 감추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 여성의 노동은 마치 자본 밖에서 이뤄지는 사적인 봉사처럼 보인다. (...) 여성은 집 안에 고립된 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 즉 출산, 양육, 훈육, 생산 노동자 시중들기를 해야 한다. 사회적 생산 주기에서 여성의 역할은 계속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여성이 하는 노동의 산물인 노동자만이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여성 자신은 전자본주의적 노동 환경에 갇혀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 (32-33쪽)

    “겉보기에는 남편이 가사 서비스의 유일한 수혜자처럼 보이는데, 이 때문에 가사노동은 모호하고 노예 상태와 유사한 특징을 띠게 된다. 다정하게 관여하고 다정하게 협박하는 남편과 아이들은 가사노동의 첫 번째 감독관, 즉 친밀한 관리자가 된다. (...) 이런 가족이야말로 노동이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도록 떠받드는 기둥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족을 상부구조로만 간주해 가족의 변화가 공장 투쟁에 따라서만 좌우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절뚝거리며 혁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급투쟁 내부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모순, 자본주의 발전을 돕는 모순을 가중시키고 영속시키게 될 것이다. (...) 주부가 계급 밖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한, 계급투쟁은 매 순간, 매 지점 지연되고 좌절되고 충분한 시야를 갖고 행동할 수 없다.” (39-40쪽)

    “가사노동 시간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의 관계를 지금 당장 전복해야 한다.” (41쪽)

    “여성 운동은 운동의 존재 자체로, 또 더욱 분명한 행동으로 여성들이 노동을 통한 해방이라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분히 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십억 톤의 목화를 자르고, 수십억 개의 그릇을 씻고, 바닥을 수십억 번 닦으며, 단어를 수십억 개 입력하고, 수십억 번 타전하며, 수십억 개의 기저귀를 빨았다. 이 모든 일을 손수, 또 기계로 했다. 저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던 영토에 ‘우리를 들여보내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착취를 마주했다.” (55쪽)

    달라 코스따는 무임금 가사노동자 여성들이 추구함직한 대안이 무작정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성장을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하는 여성의 투쟁은 가정의 고립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게 아니다. (...) 주부의 투쟁 역시 집 안에 감금되는 상황을 사무실 책상이나 공장 기계에 붙들려 있는 상황과 바꾸려는 게 아니다. (...) 여성운동이 맞닥뜨린 도전은, 여성을 집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중노예 상태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자본주의적 통제와 규격화를 막는 투쟁 양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여성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와 혁명적 정치의 경계선이다.” (56쪽)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요구 싸움을 전개해오던 중, 달라 코스따는 자본이 가사노동만큼이나 무상으로 수탈하고 심지어 불가역적으로 피폐화시키는 또 하나의 대상이 있고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초축적’기에 사람들을 땅에서 강제로 떼어내 생존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임금노동자(혹은 임금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동시에 특정 인간들(여성)에게서 땅이라는 생존수단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이중삼중으로 어렵게 만들어놓아 결국 ‘임금노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토대로 발전했다. 여성과 땅 모두 비용이 들지 않는 천연자원으로 인식하고 노동과 식량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로 취급했다.” (393쪽)

    “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선진국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선진국의 발전이 저발전을 유발했고, 그 저발전을 토대로 삼았다는 점이다. 마야족 아메리카 토착민은 자본이 처음 출현할 때 그랬던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계속 고문, 죽음, 강제노동, 기아, 토지 강제수용 및 그 토지에서 나는 자원 강제 수용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세계화되는 경제의 대가를 지불한다. 새로운 세계 경제는 발전과 저발전이 혼합된 전략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225쪽)

    “대지와 대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물, 대지를 둘러싼 공기는 하나의 생태계(...) 대지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이고, 인간은 유기체의 일부분이며, 우리는 생태계의 생명과 균형 상태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이런 인식은 자연을 인간의 ‘타자’로 보는 발상, 즉 자연이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자연의 구성 요소들은 마치 창고에 대기 중인 잠재적 상품마냥 무단으로 사용되어 마땅하다는 발상과 상반된다.” (187-188쪽)

    달라 코스따는 만약 여성들이 애초에 땅을 박탈당하지 않고 자신의 지역에서 오랫동안 그 땅을 지키며 어느 정도의 먹거리를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면 자본에 의해 임금노예화되어 영구적으로 자본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본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면 삶을 보다 더 자율적이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식량주권’이야말로 현 시대에 가장 긴급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오랫동안 ‘식량’과 ‘먹거리’를 다뤄왔으므로 두 사안은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식량 주권’(...)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직접 생산할 권리” (382쪽)

    “식량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왜냐하면 식량은 모든 권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권리, 즉 다른 모든 권리를 좌우하는 생명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을 권리 자체는 토지권 부정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부정당해왔다. (...)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살지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즉 살아남기 위한 해결책을 먼저 찾아내지 않고서는, 그밖에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모두 생존 문제에 종속된다.” (378쪽)

    “나는 식량을 공통장으로 되찾을 때만 온전한 의미의 기본권으로서 식량을 탈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식량이 만들어지는 모든 조건 역시 공통장으로 되찾게 될 때, 비로소 식량을 공통장으로 탈환할 수 있다.” (379쪽)

    “투쟁의 첫 번째 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장, 즉 생명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수단들을 직접 손에 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토지, 물, 씨앗,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오래된 사회적 지식을 손에 쥐어야 한다.” (394쪽)

    “과거의 소농처럼 자연 종자를 고르고, 지키고,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중요하다. (...) 흙, 물, 씨앗을 위한 투쟁은 생명정치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데, 그 결과가 생명은 물론이고 인류가 자유를 누릴 가능성까지 결정짓기 때문이다. 흙, 물, 씨앗을 위한 투쟁은 모든 투쟁의 근원이다. 이 투쟁의 한쪽에는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 및 소속 과학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순 소비자가 되길 거부한 채 종자를 공통장으로 지키려는 소농과 시민의 대안 농업 운동이 있다. 사실, 씨앗은 자연이 주는 선물일 뿐만 아니라 전 세대 남여 소농의 노동, 지식, 협력이다. 자연에서 얻었다고 모두 다 ‘원시적’이지는 않다.” (393쪽)

    “생태계 보호는 토지 접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 생태계 보호라는 공통장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는 믿을 수 있는 영양 공급원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을 삶의 방식과 경제 활동, 즉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활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삶의 방식과 경제 활동을 위해서이다.” (380-381쪽)

    이 시점에서 반자본주의자(다른 말로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달라 코스따는 에코페미니즘과 만나는데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삶이 자급생활의 원천인 자연과 맺는 관계, 스스로 결정할 권리, 자본주의 발전 모형 거부를 포함하는 접근법을 새롭게 제시한다. 보다 철저하게 반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은 여성을 비롯해 임금 없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떻게 투쟁해왔는지 분석해왔다. 나는 이런 반자본주의적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을 교차시킴으로써, 관점의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흥미로운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5-216쪽)

    그리고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리고베르따 멘추의 <나의 이름은 멘추>”(222쪽) 이야기를 자세히 옮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쯤에서 달라 코스따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간 반자본주의 투쟁, 즉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간 반자본주의 투쟁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이는 바로 생태주의와의 강력한 결합, 즉, 에코페미니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자본주의는 전지전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달리 보게 되었다. 요컨대, 좀 더 상대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의 전능함이란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자본주의의 목적에 맞게 모든 것을 고쳐 만드는 어떤 것이고, 세상에는 자본주의로 설명되지 않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멘추가 묘사했던 토착민에게서, 땅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동물과 맺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에게서 나는 내 역사와 정체성의 일부를 보았고, 내가 연구할 대상을 찾기도 했다. (...) 1편은 대지와 대지의 모든 존재에게 표하는 사랑과 존중을 다루며, 모든 생명체의 소통과 어울림을 이야기한다.” (222-223쪽)

    “히말라야 기슭에서 살아가는 칩코 여성의 저항(...) 다국적 기업들이 제재소를 세워 숲을 대부분 베어낼 계획으로 들어온다. 숲은 농업, 목축업과 함께 히말라야 기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들의 식량과 재생산 체계, 그리고 생활 체계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기업들은 남성들에게 일자리가 개방되면 가계 수입이 발생한다며 여성들을 유혹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기업의 유혹을 거부한 채 시위를 조직하고, 벌목 회사가 나무를 잘라내지 못하도록 밤새 나무를 껴안고 버텼다. 여성들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일자리 따위는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을 이미 갖고 있었다.” (319-320쪽)

    “한계나 윤리적 책임 문제는 여성과 농민에게 더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페미니즘 논의의 한 분야인 에코페미니즘이 젠더와 지구 관련 쟁점들을 결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에코페미니즘은 가사노동의 핵심 역할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이 수행하는 농업 노동까지 밝혀내고, 특히 남반구의 소농 운동과 함께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다. 이 소농과 여성은 모두 한계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이는 여성이 재생산 노동에 대항하는 싸움을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소농들은 화학 비료-산업 복합체 때문에 강압적으로 대지 관리의 한계선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자기 직업이 가진 존엄성과 의미를 훼손할 수밖에 없었다.” (398쪽)

    달라 코스따는 땅을 가꾸고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얻으면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살고 있는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로써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거 안정성은 기본권이자 관계망의 핵심이다. 우리가 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재생산 활동의 극히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관계망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주소가 있어야 친구들이 우리를 찾을 수 있고 편지도 보낼 수 있다.” (321쪽)

    “나는 땅과 땅에 거주하는 존재를 겨냥한 거시적 작용이 당시 도약하던 발전 국면의 핵심 상수임을 깨달았다. 이 거시적 작용은 5세기 전에 자본주의 체제를 출범시켰던 것으로, 한쪽에 토지 강제수용과 토지 축적이 있고, 다른 쪽에 궁핍해진 개인들의 축적이 있다. 개인들은 더 이상 생산과 재생산을 할 근본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고, 특히나 땅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재생산은 불가능했다. 이 거시적 작용이 오늘날에도 계속되면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한층 더 확장하고 노동은 전 세계적으로 재계층화된다.

     (...) 토지 강제수용을 핵심 요소로 삼는 시초축적 과정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빈곤과 기근을 양산해 낸다면, 이는 땅에서 쫓겨날 위험을 안고 사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전 세계인의 생활환경 및 노동 환경은 그들이 어디에 살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추방이 이뤄지고 나면 계급 상황이 재정립되고 세계 경제 속에서 노동이 재계층화되기 때문이다.” (332쪽)

    “토지는 그 어느 때보다 투기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실질적인 농업 가치와는 점점 더 멀어져 극도로 치솟은 토지 가격 때문에 땅을 일구려는 자들이 토지에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83쪽)

    이에 더해 농어촌이 어느 곳보다 살만한 곳이 되는 것만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농촌 고용을 늘려야 할 필요성은 대지를 존중하면서 관리하는 일에서 비롯한다. 이 일이 이치에 맞는 이유는 대지의 자연적 순환 체계를 보호해 대지를 생명과 영양분의 원천으로 지켜내기 때문이다.” (397쪽)

    “농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은, 농사가 다른 노동과 비슷한 정도의 적정한 소득 수준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30분마다 한 개씩 농장이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처럼 토지를 구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농사로 적정한 소득을 올리며, (...) 얼마 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많은 일자리를 농촌이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농장들이 서로 관계를 확립해나가는 일은 상당히 복잡한 과제이다.” (382-383쪽)

    “땅, 그리고 식량 생산 및 유통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식량은 공통장이라는 발상이다. 이 발상에서 시작해 기본적으로 모든 이가 식량을 가질 권리, 생존할 권리가 구체화된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세계 시장에서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소농 간의 협력, 연대, 평등이다. 이때 소농은 정직하고 다채로운 농산물을 지역 및 국내 시장에, 그 외의 남는 부분은 다른 시장에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소농의 주요 관심사는 자기 지역 주민이 가진 식품 관련 요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409쪽)

    이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달라 코스따가 지난 50여 년 동안 제시해왔던 문제들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도 새삼 시의성을 갖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한국사회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도 적잖은 설득력을 갖는다. 페미니즘을 공부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몇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나는 이 책을 단연 세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사로도, 투쟁사로도, 그리고 지금-여기에 대한 분석으로서도 안타깝게도, 손색이 없는 이상으로 오히려 바로 지금 읽혀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세상은 나아진 게 아니라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달라 코스따가 언급한 그 숱한 투쟁들은 여전히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데다가 우리에게는 이제 기후 붕괴라는 시급한 문제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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