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차오르듯 그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by 검은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조심스럽다. 예전에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좀 지나면 나아질 것이란 생각으로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러면 어찌어찌 친구나 연인으로 진척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안 좋은 형국으로 끝이 났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조심하다가 아예 누군가와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별로 내키지 않는 어두운(예를 들면, 암울한 미래를 다룬) 내용의 영화를 평단의 호평이나 영화제 수상을 이유로 본 적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거의 보는 내내 내상이 쌓여 정신이 피폐해진 채 끝나곤 했다. 현실적 상황이 비교적 안정적인 때는 그런 영화가 주는 여파가 크지 않지만, 요즘처럼 지구가 특정 감염병으로 지쳐 있는 시기에는 공포나 분노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어 짙은 잔상이 남는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무엇이든 마뜩찮은 마주침은 대부분 피하고 있다. 생의 에너지를 자아내는 대상을 만나기도 부족한 마당에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나 영화를 만나는 확률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타이틀을 접했고, 그 제목에 혹해서 영화를 보았다. 세상에 ‘복’이 많다지 않은가. 하하하.


    영화 피디인 찬실은 늘 함께 작업하던 감독의 죽음 이후 일자리에서 밀려난다. “망했다.” “망했어요.” 찬실은 누군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그 대답을 자신이 망했다는 걸 소리 내어 발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매달렸던 영화 밖의 세상에 있는,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돌아본다. 이사 간 산동네 집에서 나타난 독특한 존재(장국영-외모가 장국영과 많이 다른 귀신)가 조언한 대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를 떠나서도 살 수 있을지 깊이, 깊이 생각한다.


    그즈음 알게 된 남자 김영. 찬실은 자신이 놓친 것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연애 혹은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독립영화감독으로 시나리오 작업 중인 김영은 찬실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잔잔한 기쁨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김영의 다정한 일면을 본 찬실은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며 다가가 고백을 한다. 찬실의 갑작스런 고백에 그는 찬실을 좋은 누나로 생각한다며 물러선다.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끌리는 대상에게 거절당하고 상심하지만 차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 주변에 배우 소피, 집주인 할머니, 독립영화감독 김영과 동료들이 있다. 찬실은 그들과 함께 사는 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 영화도 있는, 좀 더 넓어진 세계로 나아간다.

    제목 이외의 다른 정보 없이 본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정말 복된 선택이었다. 어둡지 않게 표현된 ‘망함’과 ‘슬픔’ 그리고 그것을 견뎌나가는 주인공의 태도를 보며 위안을 얻었고, 장면마다 이어지는 위트 있는 대사, 잠언 같은 문장이 더해져 더 좋았다. 마음에 와 닿았던 세세한 장면들을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영화 전반부에 찬실이 김영과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장면이다. 찬실이 김영에게 호감을 가진 뒤 처음 이루어진 술자리에서 그들은 오지 야스지로의 영화 <동경 이야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동경 이야기>가 ‘조금 지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심심하다’는 김영의 말에 찬실은 흥분한 목소리로 심심한 게 어때서요, 원래 별게 아닌 게 소중한 거예요. 그런 보석 같은 게 그분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에도 특별한 사건이 없다. 찬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과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전부다. 하지만 그 바탕엔 일찌감치 던져진 감독의 죽음이 있다. <동경 이야기> 속에 어머니의 죽음이 등장하듯이 말이다. 사람의 죽음만큼 커다란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사건에서 요란함을 제거한 후 스치는 바람처럼 그를 표현했을 뿐. 이와 관련해 요새 읽고 있는 책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실이란 곧 나쁜 상태와 좋지 않은 사건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술은 주인공이나 주요 주제가 악일 경우에만, 혹은 세상의 악에 대해 어느 정도 우스꽝스럽게 절망하고 있을 때만 현실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종류를 참고 들을 수 없는 걸까? 볼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걸까?...... 죽음의 불가피성은 변함없이 나를 이끌고 나가는 주된 정조이겠지만, 그것 자체가 내 주제가 될 일은 영영 없기를 바란다.


-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 빅투아르의 가르침』 20p


    내가 줄곧 느껴왔던 일부 예술 작품 속에 비춰지는 ‘현실에 충실’한 것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불만이 이 글에 잘 표현이 되어 있다. 대개 내가 보아온 ‘현실에 충실하다’라는 표현 속 ‘현실’에는 좋지 않는 사건과 악에 물든 세상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런 것은 어떤 상투보다 더 지루하다. 오래전부터 반복되었던 것인 데다 굳이 ‘예술’이라는 틀 없이도 텔레비전의 뉴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세상 속의 악을 충분히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찬실이 영화 속에서 영화사 대표에게 묻는 ‘현실이 뭐예요’ 라는 물음 ‘현실’이 좀 더 긴밀하게 다가온다. 그 현실의 내용은 거대 악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들로, 그 순간 영화사 대표 앞에 앉은 찬실에게 주어진 것은 ‘내쳐짐을 당한 좌절’ 정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 인용 중 ‘죽음의 불가피성은 변함없이 나를 이끌고 나가는 주된 정조이겠지만, 그것 자체가 내 주제가 될 일은 영영 없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동경 이야기>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죽음의 형식과도 공명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감독의 죽음과 함께 장송곡이 울려 퍼지지만 그것은 오히려 찬실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며, 감독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몰락을 찬실 스스로 ‘망했다’라고 표현하는 순간 그 말에 녹아 있는 약간의 익살이 죽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경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무거운 그늘과 원통함이 아니라, 각기 다른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가족의 모습이다. 즉, 죽음의 정조를 작품 안에 품고 있기는 하되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전체를 장악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같은 장면(김영과 찬실의 술자리)에서 찬실이 꺼낸 ‘별 게 아닌 것의 소중함’이란 말은 찬실이 산동네 집으로 이사하던 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찬실 일행이 이삿짐을 가지고 집에 도착했을 때 집주인 할머니는 마당 한편에서 빨래줄 위에 무청을 널고 있다. 그 할머니 손에 들린 무청은 무에서 자른 지 얼마 안 된 상태인 듯 풋풋하고 힘이 있다. 이후 영화 중간 중간 변해가는 무청을 다시 볼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는 만큼 푸른빛이 사라지며 물기가 줄어드는 무청 젊음을 떠나보내며 중년으로 접어드는 찬실의 다른 모습이다. 그리하여 영화 끝부분에 다시 등장한 무청은 거의 다 말라서 누릇누릇하다. 무청이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햇빛과 바람을 견딘 후 시래기라는 새로운 가치를 지닌 식재료로 변한 것이다.


    그런 광경은 마흔 살이 된 찬실이 지나간 젊은 날들에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내다 젊음의 끝을 인식한 순간 얻는 것이 절망만은 아니라고, 또 다른 생이 시작된다고, 에너지를 흡수하던 시기에서 축적한 에너지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쓸모를 발현시켜가는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특히 ‘이 별게 아닌’ 시래기를 통해 나직하게 들려오는 소중한 이야기가 좋았다.


    두 번째로 찬실 주위의 조력자들이 발산하는 매력이 시선을 끌었다. 친한 동생인 배우 소피는 초라한 찬실의 집에 처음 와 본 후 “높으니까 다 보이네,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못 일어나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찬실이 발견해 가는 생의 에너지들과 관련 깊은 대사로 의리 있는 소피가 한층 사랑스럽게 보이는 대목.


    다음은 찬실의 집주인 할머니. 그녀는 자신이 널어놓은 무청이 햇빛이나 바람 그리고 비를 버티며 진득하게 탈바꿈하는 것을 보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찬실에게서 묻어나는 기쁨과 슬픔, 상실과 획득 또한 지켜보며 차츰 찬실과 가까워지고 마침내 자신의 가슴속에 지닌 오래된 아픔을 한 줄 시로 나누어 그녀를 울게 만든다. 찬실은 할머니의 슬픔에 자신의 힘듦을 엮어 소리 내어 울고, 그 울음을 통해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할머니는 특별한 위로를 건네지는 않는다. 그저 무청 곁에 서있는 벽처럼 찬실을 바라본다. 무심히 던지는 말들 속에 찬실이 알아야 할 귀한 것들을 슬그머니 숨겨두면서.


    세 번째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래 ‘희망가’와 찬실이 소중히 간직한 기억 속 영화 <집시의 시간> 그리고 영화 말미에 하늘에 떠오른 달이 있다. 영화 속에서 찬실은 희망가를 반복해서 흥얼거린다. 가사를 보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다-이다. 찬실이 처음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왜 철지난 구닥다리 가요를 흥얼거리나 싶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 가사를 곱씹어보니 어쩌면 이 영화는 ‘희망가’라는 노래를 길게 풀어 해석해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희망’은 극중 장국영이 찬실에게 했던 ‘자기가 정말 원하는 무엇’과 같은 말이다. 찬실이 풍진 세상 속에서 찾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그것이 ‘희망’이다. 찬실이 탄식조로 구슬프게 읊조리던 것이 사실은 희망을 부르는 손짓이었을까. 그런데 그 노래의 빛깔이, 찬실이 영화를 하게 된 계기라고 이야기하는 영화 <집시의 시간> 속 풍경과 닮았다. <집시의 시간> 속 주인공 페란은 가난한 집시로 살아야하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손풍금을 울리며 노래하고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이 없는 집시는 지붕이 없는 교회, 글씨가 없는 책과 같다.”고 말한다. 찬실과 페란은 가사는 다르지만 비슷한 바람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에 등장하는 거장들의 영화는 이 영화의 감독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의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찬실’ 이라는 ‘영화’에 갇힌 인물(캐릭터)의 한계 그리고 그가 가진 시간(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떠오른 달. 찬실이 사는 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 커다란 달이 있다.


    달은 생김새에 따라 ‘삭,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달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지만 우리가 보는 달은 전혀 보이지 상태로 시작해 반짝 등장한 후 조금씩 커지다가 어느 순간 꽉 차오른 게 된다. 아예 형체를 볼 수 없었던 달이 완벽한 원형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제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과제를 수행한 시래기와 보름달 그리고 찬실이 같은 공간에 갖춰졌다. 풍진을 지나 오롯이 차오른 찬실이 보름달에 눈을 맞추며 자신이 원하는 소원을, 희망을 건네며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에 노래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흐를 무렵엔 요사이 내 안에 누적된 여러 가지 피로감이 많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염병의 예사롭지 않은 창궐과 어지러운 사회 문제들이 내게 얹어준 무게가 다소 가벼워진 모양이다. 영화가 주는 이런 에너지라니. 잘 고른 영화 한 편이 애인의 안부 메시지보다 도움이 되는 순간이다.(개인 편차 있음-.-;) 하하하. 나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마치 무속인의 흥겨운 주문같이 반복되는 후렴구,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자꾸만 따라 불렀다. 아직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과 복이 어느 날 문득 뒷동산 위로 두둥실 떠오를 것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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