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하필과 별로였던 건에 대하여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정말 잘 살고 싶었단 말이야. 40km 풀코스 마라톤도 나가고, 이혼도 하고, 제주도에 가서 올레길도 걷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리야, 왜 하필 나여야만 했지?”


*


    수자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고 했고, 샤브샤브집이 위치한 상업지구 역 근처로 나를 불러냈다. 19년 8월 이후로 고기를 완전히 끊은 나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저녁 식사였지만, 내가 거절하면 수자는 혼자 저녁을 먹게 되므로 내색하지 않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리는 5시에 만났고, 2층인가 3층에 있는 샤브샤브 집 문 앞에 다다랐으나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30분 정도를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수자와 나는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욱 자주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타 있을 때도 있었지만, 사람이 없이 문이 열릴 때면 꼭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어떤 손님이 타 있지는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그 많은 열림과 닫힘 속에서도 우리가 있는 층에서 내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장사가 잘 안 되나 봐, 내가 말하자 그러게. 우리밖에 없네. 수자가 답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패딩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확히는, 패딩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엇박자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자를 바라보았다. 수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엄마, 울어?”


*


    일 년 전의 일이다. 딱 이맘때 즈음의 일이고, 최대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당시 상황을 묘사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대기석 의자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왜 하필 나였어야만 했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수자의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2인분이나 되는 소고기 샤브샤브를 수자 혼자 다 먹었는지 남겼는지, 어떤 채소를 가장 많이 넣고 또 다시 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꿈도 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1년 전의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또 수자의 말 몇 마디가 그 당시의 내 심장을 꽤 오래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다른 일이 세세하게 생각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같았다.


    지난 11월은 수자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자의 집에 들렀을 때, 나는 수자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써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엄마. 나 우리 여자들 이야기로 에세이 쓰려고. 나중에는 책도 내고 싶어. 엄마 얘기해도 돼?”


    꼭 옆집에 누가 이사 왔더라. 자그만 흰색 강아지를 키워. 생긴 건 귀여운데 엄청나게 짖어. 목청이 좋더라, 는 식의 남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말투였다.


    “그래. 근데 네가 뭘 안다고?”

    “뭘 안다니?”

    “너 나에 대해 잘 알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내 얘기를 써?”

    “서운하게, 내가 왜 몰라?”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고민했다. 이 글을 쓰게 되면서 나는 정말 수자를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지? 집을 빨리 떠나 독립하게 된 내가 너무나도 죄스럽고 이기적인 인간 같아서 끔찍해지면 어쩌지?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았다는 뜻이고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보겠다는 뜻이다.


*


    이 모든 이야기는 그들의 허락을 받고 쓰이게 되었다. “언니, 나는 내 얘기 써도 괜찮아. 근데 무슨 제목으로 하게?”라며 관심을 보이던 동생에게, 나는 “글쎄. 생각해봐야지. 넌 뭐가 좋을 것 같은데?”물어본 적이 있다. 동생은 “도화지 위의 그림?”, “길 위를 걷다?”같은 제목을 내놓았고, 나는 “그런 건 알라딘에 치면 백 권도 넘게 나오겠다”며 동생을 놀렸다. 결국 에세이의 제목은 하고 싶은 말에 주목하여 정하기로 하였고,


    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정리하는 일에는 성공했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이렇게 해서 잘 살아요. 어떻게든 살아요. 즐겁게 살 수 있고 멋지게 살 수 있어요. 이사할 때 원래 있던 가구들은 다 버렸어요. 거금이 들어갔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새로 시작하려고요.


    요즘 신세대들은 모두 줄임말을 쓴다. <우리끼리도 잘 살아>를 줄이면 "우잘살"이다. 꼭 우리 결혼했어요를 줄여 “우결”이라 부르던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이기도 해서 가장 적합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 진단을 받은 뒤, 20여 년 만에 이혼 도장을 찍게 된 50대 여성과 일찍 독립해 집을 나온 레즈비언 첫째 딸, 엄마와 함께 사는 바이 섹슈얼 둘째 딸, 중성화한 암컷 고양이 이랑까지.


    더 멋진 삶을 살기 위해 써보기로 했다. 이야기, 라고 쓰면 뭔가 우리의 삶이 계속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끝이 있겠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매회를 거듭할수록 쌓여가는 대본이 어디선가 굴러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


    엄마, 암에 걸린 게 뭐 어때서? 다행히 빨리 발견했잖아.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머리야 다시 자랄 거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 되고, 그러다 보면 40km 마라톤도 뛸 수 있고, 제주도 가서 올레길도 걸을 수 있어. 이혼도 하고 멋진 사람 만나서 다시 사랑도 할 수 있고, 멋진 사람이 없더라도 나랑 멋지게 살 수 있어. 나는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엄마랑 평생 놀러 다닐래.

    “엄마. 인생 끝난 거 아니야. 그냥 시작이 별로였을 뿐이야.”


-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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