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윤희에게

나에게는 여섯 살 어린 동생이 있다. 이름은 윤희다. 아빠가 술 먹다 지었다는 내 이름과는 달리 조금 더 정성스레 지은 이름 같기도 하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이 차가 많이 날수록 어색하거나 안 친한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그러나 윤희와 나는 서로에게 꽤 좋은 친구다. 아마 윤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동생이 갖고 싶었다. 그러다 정말 동생이 생겼을 땐, 너무 기쁘고 신나서 방방곡곡 동생이 생겼다며 자랑하고 소문을 내고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수자는 창피스러워했다. 이제야 수자가 왜 그랬는지를 알 것 같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 관리기사님들, 분식집, 슈퍼, 야채가게 사장님,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들, 유치원 선생님, 하물며 지나가던 멍멍이에게도 “우리 엄마 임신했다!”를 외쳐댔으니 말이다.

아무튼 윤희는 예뻤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나는 솔직히 윤희가 커서 대 배우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윤희가 조금 자라 유치원에 다닐 적에 극장에서는 <마음이>가 상영 중이었는데, 주인공으로 나온 향기는 단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윤희 머리를 똑같이 잘라주었고, 향기 머리를 한 윤희는 실제로 향기보다 더 귀여웠었다! 고슴도치 제 새끼는 예쁜 거라고 할까 봐 어릴 적 윤희의 사진을 가져왔는데, 아마 이 사진을 보면 모두 윤희의 귀여운 모습에 깜짝 놀라리라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시절. 수자와 나는 윤희의 손을 잡고 서울에 위치한 MBC 아카데미 학원으로 향했다. 이유인즉슨, 내가 “엄마! 희는 꼭 배우 시켜야 해!”라고 강력히 주장했던 까닭이었다. 수자는 “에이, 배우는 무슨 배우야.”하면서도, 진짜인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윤희는 MBC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배우고 대형 매니지먼트에 들어가 이른 나이에 아역 배우로 데뷔......!?

하진 못했다.

아카데미로 올라가는 비상구 계단에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 무리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수자는 그들을 힐끔 바라보고 내게 “여긴 아닌 것 같은데 소리야...”라고 했고, 나 또한 그들을 보고 그들의 모습에 쫄아 “응. 엄마, 여긴 안 될 것 같아.”하고 그대로 나와버렸다. 그렇게 수자와 나의 윤희 배우 데뷔시키기 모험은 깔끔하게 종료되었다.

*

2021년. 현재 윤희와 나는 같이 살진 않지만, 친구처럼 자주 만난다. 심심해서 전화하거나 놀자고 연락할 때도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너무 지치고 힘들 울면서 전화해도 잘 받아주고 위로해주기도 한다.

연애 부분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응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윤희는 나를 응원하고, 나 또한 윤희를 응원하므로 여자친구가 생기면 윤희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여자친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윤희 또한 썸이 있다거나, 누군가와 연애한다면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다거나 애인을 소개해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윤희는 연애 문제 때문에 나와 순두부찌개를 먹다가 식당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린 적도 있다. 그때 당시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웃겨서 놀리기 바빴지만, 사실 윤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 앞에서 밥을 먹다 울었을까 안타깝기도 하였다.

윤희와 내가 처음부터 이런 관계인 건 아니었다. 우리는 나이 차가 심했으므로 둘 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많은 것을 공유한다거나 함께하지 못했으며, 자주 싸웠다. 둘 다 성격이 있고 고집이 세서 싸우는 날에는 수자가 꼭 나와서 소리치곤 했다. “그만 좀 해!” 심지어는 몸싸움도 많이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못된 말과 행동으로 상처 주기도 했지만, 우리 둘은 편지나 장문의 카톡으로 얼마 안 가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라는 존재, 그러니까 나는 윤희에게 굉장히 무섭고 권위적인 존재였다.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달리 쉽게 손찌검을 하거나 욕을 했으니까. 그러한 행동들이 나보다 한참 어린 윤희에게 학대의 기억과 오랜 상처로 남을 수도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내가 그동안 윤희와 해왔던 것은 사실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나의 ‘폭력 행사’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는 윤희에게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가족’이라는 타이틀 자체를 우리 관계에서 지워버렸다.

가족이라는 말은 이따금 서로에게 지나친 상처를 줘도 괜찮다는 핑계가 된다. 나는, 내 곁에 오래 있어주었고, 또 앞으로도 오래 있어줄, 나를 믿어주고 내가 믿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자와 윤희를 가족 구성원이 아닌 ‘친구’로 대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상당히 호전되었다. 소리, 수자, 윤희. 그렇게 여자 셋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권위가 주어지지도, 구분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래야 했던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게 아닌가 슬프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욱더 많으니까 나름 희망차질 수 있었다.

*

어느 날 수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대뜸 수자가 이런 말을 꺼냈다.

“윤희가 너무 힘들어해. 술도 엄청 많이 먹고. 우울해 보여.”

나는 말했다.

“윤희한테 가서 안아주면서 위로해줘.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엄마는 항상 네 편이라고.”

수자가 퉁명스레 물었다.

“참나, 네가 뭘 안다고? 뭘 그런 것까지 해. 지가 뭐 힘든 게 있다구.”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 누구야? 나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윤희였어. 엄마 암 선고받고 병원 다니던 거, 항암 치료받을 때마다 고생하던 거, 엄마 곁에서 다 챙겨준 거 윤희였잖아. 그러니까 엄마도 윤희한테 의지가 좀 되어 줘.”

수자는 별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윤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가 뭐라 했길래 엄마가 갑자기 내 방 와서 나 안아줘?”

“뭐라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사랑한대!”

*

윤희는 꿈을 자주 꾼다. 또, 특이하게도 윤희가 꾸는 꿈은 대부분 길몽으로 해석된다. 그런 날이면 윤희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혼자 복권을 샀다가, 12시가 지나면 그때 되어서 조용히 입을 연다. “언니, 내가 꿈을 꿨는데...... 그래서 복권을......” 그런 뒤에 우리는 온종일 ‘복권에 당첨되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 속에서 서로에게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1억 원을 주고 좋은 작업실을 얻고 컴퓨터를 사고 프랑스 파리에 가서 수자 소리 윤희 셋이서 호화 여행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럼 이랑이는 어쩌지? 하고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다가, 복권 당첨 시간에 숨을 죽이고 번호를 하나둘 맞춰보다가......

낙첨된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째 번호 하나조차 안 맞으니 이제 윤희가 꾸는 꿈은 모두 개꿈이라고 치부하면서, 그 일들을 만날 때마다 떠올리고 끄집어내어 웃고 떠들다가, 다시 상상의 나락으로 왔다갔다 하기를 몇 번씩 반복하다가,

그냥 지금처럼만이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윤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등 복권 같은 애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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