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치게임

    2019년 12월, 나는 서울에 있는 집을 계약했다. 입주 일자는 2020년 1월 20일이었다. 나는 일자에 맞춰 짐을 꾸렸고, 수백 권의 책을 포장하여 이사할 집에 옮겨두었다. 원래 있던 가구는 다 버리고, 최대한 필요한 가구만 선택하여 신중하게 구매했다. 나름 로망이었던 원형 카펫을 주문했고,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로 주던 CD플레이어도 사서 싸구려 원목 선반 위에 배치해두었다.

 

*

    사람들이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집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위층 화장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1m가량의 곰팡이가 넝쿨처럼 피어 내려온 벽지. 모래가 굴러다니는 지저분한 방바닥과 청소해도 끝이 없는 고양이 배설물과 지독한 냄새, 내 것이 아님에도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는 오래된 가구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면 나는 꼭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조금씩 결핍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숨을 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숨 쉬는 일이 어려워졌다.

 

    내 생활을 바꾸는 일들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 어떤 일을 하든지 확신이 없을 때 일어난다. 이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결정된다.

 

*

    수자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2019년 12월 말 즈음이었다. 당시 수자는 매 순간 슬펐고, 매 순간 아팠고, 매 순간 두려웠고, 매 순간 분노했고, 매 순간 억울했고, 매 순간 외로웠으며, 매 순간 막막했다. 또 호소했다. 새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는 몇 시간의 정밀 검진과 의사의 말 몇 마디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형태를 잃었다.

    윤희도 마찬가지였다. 갓 스물이 된 윤희는 놀고 싶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아침까지 놀다 집에 들어와 늦잠을 자고 싶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스물을 제대로 활용하고 싶었다. 윤희에게도 집은 도피처나 안식처는 못 됐다. 윤희는 최대한 바깥으로, 외곽으로 나가고 싶었다.

 

    무작정 나는 나왔다.

    이는 눈치게임과 비슷했다. 가장 먼저 도망치는 사람이 책임을 면제받는 게임이었다. 부채감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부채감은 마치 머리카락과도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길게 자라나 풍성해졌다. 아무리 자르고, 고무줄로 꽉 묶어 두어도 생장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언니, 나는 언니가 진짜 미워.”

    “언니 혼자 살겠다고 이렇게 나가버린 게, 너무 미워.”

    “나도 놀고 싶어. 스무 살이잖아.”

    “이런 말 해서 미안해, 언니. 언니도 힘들 텐데.”

 

*

    우리는 둥그렇게 앉아 맥주를 마셨다. 3평 남짓한 내 방안은 무드 등 하나로 겨우 밝혀지고 있었고, 어둠은 얼굴에 달아오르는 열기나 화끈거림, 붉게 달아오른 피부 등을 숨기기에 용이했다. 당시 나와 내 동생은 동성 애인을 만났으므로, 네 명의 여자들이 둥그렇게 앉아 수다를 떨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명과 한 마리의 암컷 고양이가 함께하고 있었다.

 

    “너희 불 끄고 여기 모여서 뭐하니?”

    방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민 채, 수자가 물었다.

    “야옹.”

    고양이 이랑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수자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이랑에게 쏘아붙였다. 물론 장난 식이었다.

    “어쭈, 너는 왜 거기 있어! 아주 다 모여서 진짜.”

 

    수자가 문을 닫자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수자에게도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자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말 못할 비밀이 있었으니까. 실은 모든 걸 알아채고 있었겠지만, 그런데도 부정하고 싶다는 수자의 마음이 등을 돌려버린 비밀.

 

    그런 것이 우리 자매에게는 있었다.

<분갈이>

  

 

나무야 사랑해

하면 나무가 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암 투병이 시작되었다

 

실은 나, 당신을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나 보군

 

누군가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머리가 빠진다는 미신을 들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았고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주는 대신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각주:1]라는 서적이 배달되었다

 

찬 머리를 내놓고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두피를 찌를 테니 모자를 쓰고 자는 게 좋습니다

 

엄마, 엄마가 모자를 뜨고 있는 동안 누런 털의 고양이가 야자 잎을 뜯어 먹고 있어요

뒤늦게 일어나 고양이를 들어 옮기는 당신의 두 팔뚝 아래

 

미리 떠 놓은 물그릇이 엎어진다

미리 떠 놓은 모자의 정수리가 젖어간다

 

마룻바닥 틈으로 속속들이 뻗어나가던

몇 갈래의 세포

 

슬픔은 처음부터 그 안에만 있었다

 

 

 

  1. 바다출판사 출간 서적 제목, 저자 이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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