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네가 잠들 때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1. 28. 23:05
오늘 밤 네가 잠들 때
오늘 밤 네가 내게서 멀어져
너만의 슬픈 밤으로 잠들 때,
꿈속에서 내 팔을 베고 누운
근심으로 무거워진 아름다운 목.
너를 방해하는 건 내게로 던져버려
슬픈 생각들도 흐트러뜨려 그러면,
난 그 어둠들을 그림자 속에 그러모을게.
땅만 바라보며 이삭 줍는 사람처럼
사랑에 취해,
장미와 백합과 팬지의 수를 헤아리는 사람처럼...
─안나 드 노아이유
『사랑의 시들』 (1924)
원문
제목 Quand ce soir tu t'endormiras
Quand ce soir tu t'endormiras
Loin de moi, pour ta triste nuit,
En songe pose sur mon bras
Ton beau col alourdi d'ennui.
Jette vers moi ce qui t'encombre,
Défais-toi des mornes pensées,
Je les ramasserai dans l'ombre
Comme une glaneuse insensée,
Ivre d'amour, et qui dénombre
Des roses, des lys, des pensées...
─Anna de Noailles
『Poèmes de l'amour』 (1924)
다은
오늘 밤 넌 언제 잠들 거야?
라고 잘못 이해해버린 제목이었다. 민망하게도 나는 이런 오류를 자주 범하는 편이다. 가까운 이와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수다를 떨다가 던지는 듯한 물음, 그것이 내 멋대로의 감상이었다. 단어를 모아 문장으로 이어 낸 것을 파트너 민주와 합치는 때에서야 나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번역 실수가 몇 번이고 일어나는 것이 참 인간답다. 그때부터 의미를 다시 헤아리고 다잡느라 혼이 쏙 빠졌던 것이 떠오른다. 그 자리가 아마도 일산의 맛있는 파이집, 아니면 안국의 디저트도 커피도 대단한 가게, 아니면 또 다른 카페였는지는 벌써 흐려졌다. 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 골머리를 썩였으며, 그런 우리가 기꺼웠다는 사실이다.
우울은 우리 주위를 맴돈다. 가까운 이의 어둠을 대신 가져가서 문 뒤로 숨겨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네 마음을 무겁게 한 사람을 잡아다가….' 후기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할, 공격적이지만 통쾌한 장면을 상상하며 시의 정서에 이입했다. <오늘밤 네가 잠들 때>를 번역하면서 특히 고민되었던 지점은 이삭 줍는 이가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농경 생활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우리가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먼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화면에 띄우고, 이삭 한 톨, 장미 한 닢, 백합과 팬지 한 송이를 담는 반복적 노동에 생각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Pensée, 이 한 낱말로 ‘팬지’와 ‘생각’을 모두 의미할 수 있는 프랑스어는 역시 아름답다.
우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언어로 정제하며 최대한 힘써본 번역이었다. 마담 안나의 시는 옮기고 난 뒤에도 새삼스럽게 유쾌하고 아름다워서 입속으로 잠시 굴려봤다. 그가 가진 리듬은 역시 낭독으로써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다. 머지않아 마담 안나의 시에 빠져들 이들을 향해, 먼 나라의 고상한 운율을 친구가 읊어주듯 다정하게 읽게 되는 날을 꿈꾼다.
민주
뒤늦게 앓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매달린 일이 끝나면 긴장이 풀려 몸져 눕는다. 폭발적인 추동력으로 하루를 달려오다가 밤이 되면 지독한 고독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오늘 밤 네가 잠들 때」를 처음 읽었을 당시 나는 이미 ‘늦게 앓기 협회’ 우수 회원이었다. 누군가는 번아웃이라고 부르는 이 상태 때문에 잠자는 일을 몇 시간이고 미루기 일쑤였다. 길게 이어진 불면의 시절에 이 시는, 사실 주변에 언제나 떠다녔던 위로들을 직면하게 해주었다.
시에서 화자가 지친 채로 잠든 상대에게 건네는 위로의 언어는 진득하게 낭만적이다. 이삭이나 꽃잎처럼 무게는 가볍지만 흙과 물기를 머금은 듯한 말들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프랑스어로 이 시를 만났던 번역 초반에는 화자에 감정이입을 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는 상담자이자 위로 제공자이고 또한 (생채기를 낸 나쁜 사람과 담판을 짓는) 해결사이고 싶었다. 하루 끝의 상념pensée을 팬지pensée와 같은 꽃들로 맞바꿔 줄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시가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은 뒤 수정하며 낭독해볼수록, 요즘의 나는 팔을 베고 누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기꺼이 팔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들 역시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가습기 물을 채워주고, 수면 등을 꺼주고, 밤 플레이리스트를 추천해주었던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느끼기 힘들었기에, 넘치는 고마움을 이제야 가슴에 새긴다.
다은의 말처럼 우울은 언제나 우리 주변을 맴돈다. 슬픔은 당연하다. 마음껏 슬퍼하다가도 지친 마음을 환기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시를 추천한다. 정해지지 않은 위로의 방향에 몸을 맡기고 깊은 잠을 청할 수 있기를, 여러분의 밤이 조금이나마 안온해지기를 바란다.
*2연 4행은 insensée 를 '무분별한', '미친', '비상식적인' 등의 단어로 바로 옮기기에는 아쉬워서 ’땅만 바라보며 이삭 줍는 사람처럼’으로 의역했다. 애정하는 존재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우울함을 최대한 많이 골라내 그림자 속에 몰아넣고 싶어 하는 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가 소개
1914년 화가 장-루이 포항Jean-Louis Forain 그림.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본편에 소개된 시는 1924년 출간한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 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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