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간이 지나도 멋있는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1. 22. 11:56
우리는 교수님들을 참 좋아했다. 운동장에서 걸어가시는 모습으로 보나 강의하실 때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 보나 너무나도 멋있어서 외면하기 힘든 분들이었다. 프랑스어 공부를 어려워하는 친구들은 있어도 교수님들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은 없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교수님들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 진짜 멋있다”였다. 누군가가 나를 굳게 믿어주는 느낌. 우리는 자연스레 은사님들을 롤모델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팬클럽이라도 된 양 좋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학기 번역 수업에서 C 교수님은 나와 다은에게 학술제에서 4학년 대표로 시 한 편을 낭독하라고 했다. 나는 이미 2학년 대표로 나간 적이 있었고, 3학년 대표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던, 주목받기 좋아하는 학생이었기에 친한 친구와 졸업 전에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서 신이 났다. 제안을 받자마자 어떤 콘셉트로 무대에 올라야 하는지에 관해 상의하는, 못 말리는 우리에게 교수님은, 시를 직접 번역한 뒤 낭독하라는 미션을 주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는 보들레르가 쓴 「여행에의 초대」였다. 나로서는 저자와 시에 대해 알맹이는 잘 모르고 ‘참 유명하지.’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시를 번역하는 것 자체도 낯선 작업이었다.
그나마 한국어 시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당시 내가 누리던 최고의 휴식은 시집을 읽으며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으며, 최고로 재밌었던 모임은 시 동아리였다. 공부와 사회생활, 페미니즘 학회 활동은 즐겁긴 했지만 적당한 긴장감과 리더십을 요구했다. 그 적당함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가 쌓였다. 시는 책장에 꽂혀서, 가방에 담겨서, 서점의 매대에서 나를 다독였다.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쓴 시에는 분노와 무서움이 많이 들어있었다. 시에게서 위로를 받으면서도 일러바치고 싶은 것들이 한 가득인 때였다. 거칠고 투박한 시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다은이를 비롯해 절친한 과 친구들에게 슥 내밀었다. 친구들은 당황한 티도 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은 글자들을 이해해주었다. 시와 함께라면 나는 퍽 당돌해졌다.
다른 언어, 다른 시대, 다른 성별. 이 앞에서는 당돌해지기 힘들었다. 작가 사후 30년이 지났으니 저작권 문제도 없고 우리의 낭독이 수익을 내려는 시도도 아니니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됐지만, 잘 번역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에 그랬다. 우리가 생각하는 ‘잘’은 ‘제대로’와 ‘새롭게’가 합쳐진 개념이었다. 프랑스어도, 시도 좋아하기 때문에 잘 해보고 싶었다. 인터넷에 「여행에의 초대」를 검색했다. 유명한 남성이 한 여성에게 쓴 시였다. 한국어본을 읽어봤다. 지금은 쓰지 않는 어조였다. 시는 분명 아름다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시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어졌고 다은의 아이디어로 ‘누이’로 많이 번역된 sœur를 ‘자매’로 바꾸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화자를 여성으로 바꿔서 시를 다시 봤다. 보들레르는 남성이지만, 2010년대의 20대 여성이 읽기에 이 시는 자매, 연인, 어머니에게 당신을 닮은 이국적인 나라에 가서 여유롭게 사랑하자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분명했다.
번역을 끝낸 뒤에는 낭독 시 큰 스크린에 띄울 이미지를 만들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표지 느낌을 내고 싶었다. 각 연을 대표하는 컬러를 정해서 배경으로 깔고 번역한 텍스트를 넣었다. C 교수님이 번역 피드백뿐만 아니라, 마지막 연에서는 ‘황금빛 들판’의 느낌이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보태줘서 풍부한 색감의 ‘「여행에의 초대」-진짜 최종.psd’가 완성됐다. B 교수님은 모국어 화자의 입장으로서 우리의 낭독 톤과 속도를 세심하게 짚어주었다. K 교수님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많은 분들이 도와줬으니까 우리만 잘하면 되겠지. 우리는 공강 시간마다 운동장을 돌며 시를 열심히 외웠다. 우리는 번역에서 낭독으로 가는 모든 과정을 좋아하게 됐다.
링크: https://blog.naver.com/mincantadora/222212510426
‘낭독의 밤은 서늘했다. 우리는 그 푸른 분위기와 어울리려 드레스코드로 파랑을 휘감고 만났다…’라고 멋부리며 그날을 정리하기에 우린 많이 긴장했다. 낮부터 우리 집에 모여서 과카몰레를 만들어 먹고 하이볼을 타 마셨다. 잘 먹어야 했고 좀 취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멋과 재미에 취해 그날 밤을 마무리했다. 몽롱한 그날을 필름카메라로 남겨둬서 다행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권해서, 좋아하는 사람끼리, 좋아하는 장르를 번역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많은 문장을 써내려갔다. 한국에서 프랑스 문학이 꽤 소비되고 있음에도 프랑스 여성 시인의 작품은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서 글자로 만나지 못했지만, 만나기만 한다면 좋은 목소리는 아주 많다. 표현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덕심을 유발하는 작가들도 많다. 번역 전문가가 아닌 우리 팀이, ‘시간결정’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께 가닿을 번역을 매주 선물할 것이다. 다음 주부터 ‘안나 드 노아이유’를 시작으로 국내에 더 잘 알려져야 할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계절과 상황에 맞게 큐레이션하겠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 노래 가사, 영화 등을 재료로 한 온라인 모임을 여는 등 재밌는 기획을 선보일 테니 독자 분들도 읽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어느 봄에 우리는 망사 스타킹을 신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채 동아리 홍보를 한 적이 있다. 선글라스까지 썼기 때문에 몇몇은 우릴 진짜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멋있는 교수님들은 그날도 스카프를 휘날리며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페미니즘 학회 명함도 한 장 달라고 했다. 그리고 너무 멋있는 제자들이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몇 분 뒤, 단톡방이 만들어지고 사진이 도착했다. 초록 운동장에 요란한 복장을 한 우리가 우뚝 서 있었다. "너희 진짜 멋있어^^" 이제 우리는 그때와 다르게 입고 다르게 생각하지만, 서로 좋아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여성들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한다. 각기 다르게 멋있는 여러분의 일상에 시 한 편 읽는 시간을 선물하는 매주 금요일을 기쁘게 기다려본다.
글 민주
그림 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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