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사랑

계절과 사랑

 

해가 내리쬐는 잔디밭은

보랏빛 초롱꽃으로 가득차 있어.

지치고 그을린 날은 헐떡이고

풍차의 날개에 매달려 있지.

 

자연은 한 마리 벌처럼

꿀과 향기로 가득하고,

바람은 꽃들 사이에서 몸을 흔들고

반짝이는 온 여름은 선잠을 자네.

 

오, 아침의 맑은 명랑함이여.

자신만의 흐름으로 꾸밈없는

영혼이 춤추는 곳,

꼭 파초 잎이 드리우는 샘처럼!

 

빛을 발하는 거미들은

진홍빛 실을 따라서 미끄러지고,

젖은 그늘의 열기 속에서

심장은 태양빛을 타래에 감는다.

 

한낮의 취기,

소 떼가 타고 오르는 적갈색 포도밭,

지평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입술을 누르는 어지러움.

 

고개 숙인 호밀밭 한가운데에

서있는 오두막들,

넓고 낮은 문 앞에

어린 구즈베리 나무들이 있는 풍경...

 

공기가 잠잠해지고

잘 익은 수확물이 고개를 숙이고

뜨겁고 욕망에 불타는

이삭처럼 고단한 영혼이 있는 밤.

 

순진한 충동으로 뛰어오르는

가을 새벽의 환희

심장은 모든 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생기 있는 덤불 같아!

 

인간 욕망의 무기력한 밤

버드나무처럼 구부러진 몸들

어깨에 맞붙은 손들과

빈손들에 파묻혀 우는 눈망울들

 

오, 행복한 계절의 꿈들이여

사랑에 빠진 마음들의 둘레에서

달과 해가 진홍빛 광선으로

거품을 내는 시간들이여...

 

─안나 드 노아이유

『헤아릴 수 없는 마음』 (1901)

원문: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les-saisons-et-l-amour.php


다은

 

민주

「계절과 사랑」이 전하려는 마음이란 뭘까. 계절마다 화자를 들뜨게 하고 슬프게도 하는 존재는 시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행복한 계절의 꿈들에 일일이 감탄을 보내며 꾹꾹 누른 발자국을 남기는 어떤 뒷모습이 보인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자연을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일 년이 지난다. 그렇게 이 시는 하루 단위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마음에 보다 긴 기간의 위로를 건넨다. 시간은 직진해서 돌아오지 않지만, 자연의 흐름은 동그랗고 일정하다는 사실. 이는 언제나 회복에 대한 가능성을 안긴다. 활기찬 감정들만큼 지침, 고단함 등의 기분들이 시에 두루 표현된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은,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다’와 ‘어떤 마음이라도 생기고 없어질 수 있다’는 거였다.


봄에게

봄아, 쌀쌀하고 쌉쌀한 공기를 타고 갔던 경주가 생각나. 우리 여행의 처음과 끝은 커피였지. 시작의 맛은 페뜨, 그러니까 축제였고 마지막의 맛은 맥도날드 라바짜였다. 차가운 라바짜는 덜덜대는 캐리어를 몇 백 미터나 움직인 후에 마셔서 그런가, 반듯한 얼음 속에 끼여서 굴러다니는 맛이었어. 곧 끝나는 여행에 내 근육들도 네모네모 각져버렸었지. 꽃샘추위는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됐어. 그래도 네가 해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아. 네가 보고 싶어.

 

여름에게

여름. 난 널 제일 좋아해. 매해 투박한 과일 바구니를 선물하는 너. ‘아이보리, 노랑, 초록.’ 네 피부색을 묻는 어이없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야. 어차피 우린 다 땀이나 흘리는데 껍데기 따위 무슨 소용인지 몰라. 자꾸만 추상적으로 말해서 미안해. 제일 좋아하니까 횡설수설하게 된다.

 

가을에게

맑고 푸르고 산들산들하고 안온하다는 말로 네가 보여준 노력들을 다 알아채지 못했어. 그래도 이것 하나 알아줘. 널 싫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겨울에게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기던 날에 첫눈이 왔다. 겨울 네가 꼽는 최악의 농담 “올해의 첫눈은 이미 1월에 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질색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강아지한테 설명해주다가 아래를 보니까 귀여운 발바닥 자국들이 되게 많더라. 사람들은 눈 맞는 강아지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행복해 보였어. 염화칼슘 닿지 않게 이쪽 방향으로. 신발을 신지 않고 밟으면 안 되니까 꼭 살에 닿지 않게 걷거나, 뿌리고 눈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데. 이제 창문에 기대서 눈이 얼마나 녹았나 바라보는 시간들을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아. 길이 건조해지면 척척했던 시간은 잘 기억이 안 나고 빠르고 힘차게 걸어가게 돼.


가끔 이렇게 사람이 아닌 것에게도 편지를 쓴다. 그립거나 쳐다도 보기 싫은 한 시기, 계절에도 보낸다. 어딘가 모호하지만 쓰는 동안에는 기분에 펜을 내어주고 자유롭게 마음껏 적는다. 보통 안정보다는 불안을 느낄 때 주로 하는 일이다. 친구처럼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추운 계절을 데워보는 건 내게 명상만큼이나 좋았다. 안나 드 노아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거미’로도 눈부신 진홍빛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으니까. 터무니없는 얘기처럼 느껴지더라도 계속 기록해서 날씨마다 우리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 소개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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