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서평 / by 손보미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 회원)


 

1. 디지털

 

    최근 포스트휴먼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련 논의들도 활발해졌다. 그중에서도 이 책,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에서 눈에 띄는 점은 디지털이라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이 무엇일까? 단어 자체가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다. 문제는 그에 반해 정작 단어의 의미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펼치기에 앞서 디지털이라는 말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찾아봐야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간단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디지털이란 기술의 하나이며 정보의 형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디지털 정보는 01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01로 구성된다는 설명만으론 감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보의 특징을 설명하는 글을 보며 조금씩 감을 잡아 볼 수 있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 정보는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다.

디지털 정보는 빠른 검색이 가능하다.

디지털 정보는 편집과 조작이 쉽다.

디지털 정보는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된다.

    문득 이 특징들에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를 붙여보고 싶어졌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빠른 검색이 가능하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편집과 조작이 쉽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된다.

    그럴듯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문장들이 만들어진다.

 

2. 디지털 포스트휴먼

 

    책의 서문은 디지털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이유로 시작한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적 결합의 상황을 진단(5)”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인상적인 도입이다. 짧은 문장 속에 우리는 이미혼종적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적 결합이라는 주제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이때 흔히 기계팔이나 기계심장 등을 이식받은 기계인간의 모습이 일례로 제시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기계인간의 출현도 중요한 현상 중 하나이고 또 무엇보다 쉽게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되려 그 쉽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생기는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보철을 이식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을 그리는 순간, 혼종성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간에 특수한 상황에 부닥친 일부의 인간들만이 겪고 있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 혼종성이란 곧 닥칠지 모르는 미래의 일로 여겨지게 되고, 그것의 효과를 가늠할 수 없어서 생겨난 불안 속에 막연한 희망 혹은 절망만 부추기는 이야기들이 금방 들어차게 된다.

    책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이러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넘어선다. 디지털 기술에 초점을 맞춘 서문을 따라가다 보면 기계와 인간의 혼종적 결합은 디지털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것만큼이나 오래되고 광범위한, ‘이미보편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문제들은 불안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진행될 대로 진행되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긴급하게 제기된 것임을 더 잘 실감할 수 있다.

    책 서문의 저자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 순간부터 기계는 인간들을 매개하는 단순한 도구이기를 넘어서 인간의 일부가 되었고, 인간도 단순한 사용자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존재 양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디지털 기기에서 그러할까?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 매체의 사용은 감각의 매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할 뿐 아니라, 기존의 수용된 감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작동하게 하며, 감각의 수용과 작용의 영역을 변화(6)”시키기 때문이다. 감각이 변했다는 것은 곧 몸이 변했다는 말이다. 변한 몸은 개별적, 집단적 삶의 양식 변화를 요청한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가 디지털 감각의 변화와 포스트휴먼 윤리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디지털 쓰레기

 

    새로운 몸들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몸들은 당연히 어려움에 부닥치고 결국에는 생존마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휴먼을 이야기하며 현재의 기술을 비평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단호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의 3<디지털 감각의 변화와 포스트휴먼 윤리>에 실린 저자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기술 이후 등장한 포스트휴먼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몸의 활동들이 시시각각 디지털로 전환되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고 또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재생되며 수많은 몸과 다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가 인터넷이라 부르는 일종의 가상공간도 몸이라는 물질성에서 탈각된 공간이 아니다. 되려 수많은 몸과 욕동이 들끓고 흘러넘치는 공간이다. 문제는 이 몸들의 얽힘이 현재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가이다.

    책의 3부에 수록된 글, 「디지털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 플랫폼, 개인, 그리고 디지털 쓰레기는 팬대믹 이후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급증한 독성 디지털 쓰레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성 디지털 쓰레기는 여러 혐오 표현을 총칭하는 말인데 주로 성적이거나 포르노그라피적인 콘텐츠, 아동 및 성인에 대한 성적, 육체적 학대, 동물 학대나 고문, 전쟁이나 분쟁과 관련한 폭력적 콘텐츠, 충격을 주거나 호색적 관심에 호소하는 음란한 콘텐츠 혹은 불쾌한 콘텐츠 등이 이에 포함된다. (242)”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쓰레기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글로벌 네트워크, 타자화와 폭력의 인류 역사, 기술적 장치의 배치 등 다양한 인간-비인간 행위자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243)”고 말한다.

    디지털 쓰레기는 그 어떤 쓰레기보다 강한 독성을 내뿜으며 생명을 죽인다. 게다가 이 쓰레기는 완벽하게 복제되고 빠르게 검색되고 쉽게 편집, 조작되며 네트워크로 전송되어 수많은 몸과 얽히면서 어떤 몸은 죽게 하고 또 어떤 몸은 죽이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쓰레기를 분석하며 기술의 편향성이라는 문제를 지적한다. 인터넷 플랫폼 기업의 경영 주체들은 기술의 중립성을 근거로 들며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사실상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그 어떤 기술도 결코 중립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에 유리하게 운용, 관리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알고리즘은 기존의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또한 더 많은 이윤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상품 생산의 도구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4. 디지털 원유

 

검색 엔진의 데이터는 내연 기관이 발명되기 전에 발견된 석유 같은 거야. 아무도 쓸 줄 모르는 천연자원 같은 거지.”

- 영화 엑스 마키나」, 네이선 베이트먼의 대사 중에.

 

    네이선 베이트먼은 소프트웨어 회사인 블루북의 CEO. 네이선은 디지털 데이터를 정확히 석유로 지칭한다. “~ 같은 거야.”라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실제로 데이터를 원료로 삼아 구동되는 내연 기관을 발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연 기관이란 연료를 연소해 에너지를 얻는 기관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얻는 과정 중에 이산화탄소라는 부산물이 만들어지는데 이 부산물은 산소호흡을 하도록 진화한 많은 개체에 위험한 물질일 뿐 아니라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을 상승시켜 전체 생태계를 위협하는 원인 물질이기도 하다.

    검색 엔진의 데이터는 석유처럼 쓰인다는 네이선의 표현은 옳다. 하지만 자신이 디지털 원유를 잘 쓸 줄 아는 내연 기관을 최초로 발명했다는 말은 틀렸다. 이미 독성 디지털 쓰레기라는 부산물을 세계 곳곳에 배출하며 활발하게 작동하는 내연 기관들이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디지털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 플랫폼, 개인, 그리고 디지털 쓰레기에 흥미로운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이지은의 연구는 구글에서 한국어로 길거리를 검색한 결과가 한국의 길거리에서 여성의 몸매, 외모를 관음증적으로 불법촬영한 사진들로 나타나며, 이 이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남초 커뮤니티의 야짤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250)” 이 연구 사례에서 등장하는 구글을 디지털 포스트휴먼에서 시추한 원료인 데이터로 구동되는 내연 기관으로, ‘야짤을 그 내연 기관이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생겨난 유독한 부산물로 지칭하는 것은 과연 과장된 것일까?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평균 온도를 상승시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듯, 독성 디지털 쓰레기는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왜곡된 욕망을 더욱 증폭시켜 디지털 포스트휴먼 생태계를 파괴한다.

 

5.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주체성

 

    책에 실린 많은 글이 기술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책에 실린 글들뿐 아니라 최근 여러 논의 들에서 기술의 편향성을 주장하며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기술의 중립성과 편향성을 대비 시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까? 이러한 논쟁 구도는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CEO들의 시선에 잘 들어맞는 구도가 아닐까? 나는 여전히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작동 중인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이 둘을 동시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기술은 생명에 해로운 쪽으로 혹은 이로운 쪽으로, 즉 어느 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술이 과연 중립적인가 편향적인가를 가르기보다는 그 기술이 현재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는지, 또 그렇게 연결, 작동될 때 그 기술은 어느 쪽으로 기울 게 되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동시에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현재 기술이 취하고 있는 편향이 절대적인 게 아님을 알려 주고 따라서 그 방향을 바꿀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생명을 죽이는 방향으로 치우쳐 작동하는 기술을 향해 단순히 편향적이라고만 목소리를 높인다면 기술에 대한 지나친 반감만 불러올 수 있다. 기술에 대한 막연한 반감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려 문제의 기술을 이로운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는 관심과 힘이 약해지게 만들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포스트휴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 기술이 현재 무엇과 가장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은 잘 알고 있다. 바로 자본, 자본에 예속된 주체들이다. 현재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과 인공지능 콘텐츠들이 포스트휴먼으로부터 시추한 데이터를 연료로 태우는 내연 기관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안에서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들은 각종 데이터 노동으로 생명을 강탈당하고 또 그 내연 기관이 내뿜는 유독한 부산물에 고통받는다. 이 서평의 도입부에서 디지털 정보의 특징을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특징으로 변주해 만들어진 찜찜한 문장들도 실은 디지털 정보를 천연자원으로 바라보는 주체들의 시선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예속된 주체의 맹위를 잠재우고 디지털 기술을 생명에 이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을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에 걸맞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그리는 일은 이롭지도, 또 가능하지도 않다. 세계 곳곳에서 각각의 상황에 적합한 수천수만 가지 다양한 모습의 주체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낱낱으로 흩어진 다양하기만 한 것들은 흐름을 다른 쪽으로 돌릴 힘이 없다. 다양한 것들의 공통되기가 필요하다. 제각기 다른 모습 제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주체들에게는 공통의 지평이 필요하다. 이 공통의 지평은 모두의 생명 활동에서 만들어진, 또 모두의 몸과 연결된 디지털 데이터를 결코 자본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통의 지평 위에서 저마다 다른 주체들의 내적 차이는 활발히 작동하며 힘센 다중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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